3. 성령론_ 우리들의 특유의 교의

성인성경학교 2024. 1. 17. 16:29

 

하나님의 성회

                                                                     우리들의 특유의 교의

                                                                    성령 세례

- 20 가지 질문과 대답 -

 

 

미국 하나님의 성회 한국총회

 

   

성령 세례: 그것은 무엇이며, 누가 그것을 체험할 있습니까?

 

성령 세례의 목적

1.    기독교인이 구원을 받을 때에 성령 세례를 받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체험이 세례와 어떻게 다릅니까?

 

2.    사람이 성령 세례를 받지 않고도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 면, 우리들은 성령 세례를 받아야만 합니까?

 

3.    사람이 한번 성령 세례를 받으면 후에 재충만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까?

 

4.    성령 세례를 받았을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 공중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것” 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또한 신자의 개인 기도 생활에서 “방언으로 기도하 것”은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방언과 은사의 사용

5.    성경의 기준에 의해 공중석에서 방언으로 말할 때, 항상 방언 통역이 있어야만 합니 까? 누가 방언 통역을 해야 합니까?

6.    방언으로 말함과 후에 따르는 방언 통역은 누구에게 유익함이 있으며, 무슨 목적 있습니까?

7.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방언 통역이 가능합니까?

8.    교회에서 방언과 다른 은사들이 역사할 때에 우리들이 역할을 담당합니까? 혼돈 되는 질문들에 대한 성경적 답변들

9.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지 않고도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있습니까?

 

10.    신약 성경에 기록된 첫번 성령이 임하였을 때에, 불의 같이 갈라지는 것과

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이 오늘날에는 일어나지 습니까?

11.    동시에 구원을 받는 것과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이 가능합니까?

12.  고린도전서 13:8 절은 “방언도 폐하고” 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은 성령 세례가 단지 2000 초대  신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까?

13.  바울은 고린도전서 14:19 절에서 교회에서 “깨달은 마음으로 . . . 말하는 것이 . . .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라고 말했는데, 말씀은 방언의 체험이 오늘 날에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14.    오늘날 체험하는 성령의 부으심이 진정으로 성경적이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15.  오순절파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 12-14 장에서 오직 언급한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서 강조합니까?

 

성령 세례 받기

16.  누가 성령 세례를 받아야만 합니까?

17.  사람들이 성령에 충만함을 받을 그들은 절반은 의식이 없는 상태입니까? 아니 그들은 완전히 정신이 있으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의식하고 있습니까?

18.  어떤 사람은 즉시 성령 세례를 받으며, 어떤 사람들은 오랫동안 갈망하여도 받지 못합니까?

19.  개인이 성령 세례를 받기를 원할 성령 충만함을 빨리 받기 위해 그의 생활이나 주위 환경에서 준비할 있는 것이 있습니까?

20.  방언이 성령 충만함에 대한 유일한 증거입니까? 성령 세례를 받은 후에 사람의 태도나 행동에 어떤 의미있는 변화가 있습니까?

 

성령 세례: 그것은 무엇이며, 누가 그것을 체험할

있습니까?

 

교회의 어떤 교의 보다도 많은 질문과 논란을 일으킨 것은 없습니다. 그 러한 논쟁은 사도행전 2 장에 기록된 오순절날의 이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 다. 그러한 일을 처음 사람들은 질문을 했으며, 사도 베드로는 그러한 질문 에 대한 답변을 하기 위해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청중들에게 성령님에 대한 깨달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 구약 성경의 선지자들에 관하여 이야기 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성령의 바람은 결코 잠잠하지 않았습니다. 2 세기의 터툴리안으로 부터 10 세기의 시메온, 18 세기의 요한 웨슬리, 그리고 19 세기의 미국 부흥사들까지 하나 님의 백성들은 성령님의 강력한 나타내심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가장 위대한 역사는 20 세기 초에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보다 완전한 체험을 갈망하던 개의 작은 경건한 모임의 회원들은 성령의 은사의 회복을 목격하였습 니다. 그들의 모임에서 그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과 비슷한 이적들을 보았습니다. 성 령 세례를 체험한 사람들은 방언으로 말을 하였으며, 예언을 하였고 병자를 위하여 기도했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으며, 새로운 선교 사역의 물결이 일어나서 세계로 뻗어 나갔습니다.

 

이러한 20 세기의 오순절파 사람들은 그들의 영적 체험이 사도행전 1:4, 5 기록된 예수 님의 약속이 실현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약속”이 “모든 신자들이 받을만 하고, 열렬히 고대하고 진정으로 구해야만 하는” (P. C. Nelson, 성경 교의, 77 ) 체험으로 믿었습니다.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그들의 강조는 거의 모든 기존 기독교

체들과의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오순절파 사람들은 조롱을 받고 기존의 교회들로부 내어 쫒김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부흥은 계속되었습니다. 이들 “거룩한 무리들”은 야외에서 이거나 점포를 임대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치유와 구원의 이적들은 군중을 끌어들였습 니다. 그들을 비웃던 호기심에 사람들은 흔히 기도하기 위해서 남아 있었습니다. 처음 에는 무리들은 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지만, 그러나 그러한 이적이 계속됨에 따라 모이는 사람들은 사업가나 전문가들로 불어났습니다.

 

50 동안 오순절파 사람들은 교회와 대학들을 설립하고 사역자들을 훈련시켰습니 다. 그들은 주일 학교를 조직하였고 선교사들을 파송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에 중점을 두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다음 1960 년대에는 다른 부흥의 물결이 오순절의 축복을 전파했습니다. 많은 루터 교 신자들이 방언으로 말을 하고 병자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로마 캐토릭 신자들이 예배 중에 손을 들고 성령 안에서 기도했습니다. 장로교 신자들, 성공회 신자들, 감리교 신자들, 침례교 신자들, 형제교 신자들, 그리스도의 제자회 신자들 --- 성령의 바람 모든 교회들에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그들의 믿음에 대해 진지한 모든 교파의 신자들은 “아버지의 약속”을 바라봅니다. 체험은, 구원과 별개의 것으로 구원 후에 따르는 것으로, 성령 충만한 삶의 부요함으로 신자를 인도합니다.

 

성령님으로 하여금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영혼이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갖도록 함으 로서 질문에 대해서 가장 대답을 하며, 논란을 가장 해결하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신실한 신자들이 이러한 복된 체험을 하는 것으로부터 방해하는 성령 세례의

교의에 관한 오해가 있습니다. 대답을 요구하는 진정한 질문들이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그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성령 세례의 목적

 

1.     기독교인이 구원을 받을 때에 성령 세례를 받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체험이 성령 세례와 어떻게 다릅니까?

 

예,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성령님이 그들의 삶에 위대한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성령님은 그들의 죄에 대하여 책망하시며, 의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며, 그들과 함께 거하십 니다 (요한복음 6:44; 14:17; 로마서 8:9; 고린도전서 12:13). 아무도 성령의 자비로운 사하심이 없이는 기독교인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라고 불리우는 성령의 다른 그리고 특유의 사역이 있습니다. 세례는 모든 믿는 자에게 약속하신 아버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있게 만드는 선물입니다 (마태복 3:11; 누가복음 11:13; 24:49; 사도행전 2:33, 38). 그것은 기독교인이 거룩한 삶을 살 도록 도와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새로운 헌신적 애정을 갖게 해주며, 그것은 예수님을 매우 사실적이고 귀한 분으로 만들어 줍니다. 세례의 주된 목적은 증인의 역 할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더욱 능력을 베풀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8). 다른 유익 한 점은 영적 예배에 있어서 가지는 더욱 기쁨과 세계를 향한 우리의 사명에 대해 더욱 고무된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성령세례 간증 모음

 

이민 와서 신앙생활 하며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주의 은혜를 알게 이후 나의 행동반경은 교회, 가정, 직장 삼각지대를 벗어나 본일이 없습니다. 교회 중심적인 생활이지요. 당연히 수십년을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가서 뒤로 잠그고 나오는 그러한 신앙생활로 모든 공예배와 부흥회, 특별집회의 현장에 제가 있습니다. 당연히 예배준비와 예배실 뒷정돈까지 담당 입니다. 그러면서 성령세례 받고 기뻐 어쩔줄 몰라하는 여러 성도님들 수없이 보아 왔습니다.

 

1. 중에는 한국에서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유학생활로 미국으로 와서 10년동안 공부하며 신앙생활 열심히 하다가 부부박사 학위에다, 아들 낳고 한국으로 떠나기 직전 부부가 성령세례 받고 금의환향하는 복된 성도의 귀환을 여럿 보아 왔습니다. 성령세례 받고 기뻐서 얼굴에 홍조를 뛰며(신부의 얼굴에 연지 곤지 발라야만 있을법한 그런 홍조) 기뻐하는 모습, 자신이 처음 성령세례 받을 때의 담담하던 기쁨보다도 더한 기쁨으로 다가오곤 하던 기쁨, 세상에서는 맛볼 없는 그런 기쁨 입니다.

 

2. 친한 친구 사이인 자매가 성경공부에 참석하게 되고 성령세례에 대하여 공부한 이후, 부흥회에서 입니다. 자매는 성령세례 받고, 다른 자매는 자신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예배 성전에서 대성통곡을 하게 됩니다, 이를 아시게 목사님이모든 죄를 자복하라하며 안수를 합니다. 자매주님! 잘못 했습니다. 주님! 잘못 했습니다하며 째지는 듯한 절규의 자복이 있자, 자매의 입에서 따라락 하며 금속성 같은 소리로 방언이 터져 나올 때의 모습이 선합니다. 자매의 남편들은 한전에서 wasting house 파견 나와있는 engineers 님들.

 

나는 이후로 죄를 자복할 성령세례를 주시는 성령님을 더욱 경외하게 되고, 집회 후에도 나타나는 성령님의 민감한 역사를 놓치지 않으려 끝까지 성전을 떠나지 않는 버릇이 있습니다.

 

3. 하성의 어느 목사님은 목사가 된지 7년이 되기까지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고 방언을 할줄 몰랐다고 합니다. 성령세례을 간절히 사모하며 밤마다 지붕에 올라가서 별을 세며 기도를 해도 방언을 주시더랍니다.  오순절 교회의 목사이기에 얼마나 간절 했겠나 짐작이 가는 대목 입니다. 그런데 주일 날에 흑인아이 하나가 성전에서 슬피 울고 있더랍니다. 아이가 슬피 우는 것이 어찌나 불쌍한지 아이를 앉고 같이 기도하는데, 그리도 간절히 사모하던 방언이 갑자기 터지게 되고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4. 부엌에서 음식을 조리해 성도들 섬기기를 즐겨 하는 집사님, 목사님과 면담을 하는데 목사님이집사님은 음식으로 섬기기를 좋아하는데 섬김이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로 하지 않고 자신의 기쁨을 위해 하기 때문 입니다?  면담이 끝나고 집사님은 속이 많이 상합니다.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내가 일이라고는 음식 만드는 외에 아무것도 없기에 부엌에서 헌신하는데, 목사님은 그것도 모르시고 야단만 치시다니, 분하고 억울하고 속상해서 예배실에 올라가서 기도 합니다. 독이 올라 주님께 하소연하며 기도를 하는데, 하고자 하는 기도는 나오고 말이 꼬이며 바라지도 않던 방언, 성령세례를 받게 내자 집사님^^ 입니다.

 

5. 사랑의 불꼿(Tres Dias)이라는 집회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는 감사의 눈물로 밤낮을 지새는 집사님, 은혜를 받은 성찬예식에서 반주자의 때롱하고 시작하는 반주에 맞추어 성령님께서 눈물 button 누르셨는지, 동시에 눈물이 쏟아지며 주체할 없는 눈물을 흘리며 성찬위원으로 떡과 잔을 돌리던 집사, 후에 성령이란 단어에 눈을 뜨게 되고 더욱 은혜를 사모하게 됩니다. 가족수련회에서방언 받기 원하면 앞으로 나오라  장로교회에서 오신 강사의 초청하는 소리에 일착으로 앞으로 나가 땅바닥에 무릎 끓고 기도를 합니다. “성령님이 임하실텐데 모두들 죄를 회개하라 외친다. 집사님 모든 죄를 자복하며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나는 잘못까지도 낱낱이 고백하며 회개 한다. 안수하며무엇을 원하느냐? 강사목사의 질문에.“방언을 합니다큰소리로 답하며, 할렐루야를 외친다, 계속되는 할렐루야가 이상한 소리로 꼬이며 이전에 알지 못하던 소리가 입술에서 나온다. 사모하던 방언, 성령세례의 순간이다. 도시 교계에 급뉴스, 여야(잠긴동산) 집사가 ~~란하게도 성령세례를 받았다더라.

 

여러 말로 방언 받은 예들을 열거함은, 은혜를 더욱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에게, 주시고마 약속하신 성령세례의 역사를 나타내고자 함이다.

 

여야 집사, 방언 허락하심을 감사함으로 새벽기도, 부흥회 열심으로 사용하던 . 10여년 동안 사용하던 랄랄랄 방언, 순간 거두어 가시고 새로운 방언을 주셨는데, 순전한 각종 언어 방언 이다.

 

금요예배에서, 당시 가장 사모하던 말씀이 본문으로 선포되는 순간, 심장은 쿵쾅되며 몸에 전율이 온다. 설교 시간 후에 기도 시간이다, 자신을 마음대로 컨트롤 없이 무언가에 억제 당하여, 성령님께 붙잡힌 듯한 상태로 기도를 한다, 평소 같으면 기도한지 얼마 시간이 지나서 깊은 기도에 들어 갔을 때에야 나오던 방언이, 기도 시작과 동시에 컨트롤 없는 언어로 나온다, 마치 audio cassette tape 뒤집혀서 꺼꾸로 돌아갈 들리는 소리와 동일하다. 이렇게 새로운 방언을 받게 되었다.

 

각종 방언 방언찬양이, 나의 , , 육의 상태, 기분에 따라 어떤 언어로 나올 줄을 모른다. 비록 피곤하더라도 입을 열어 성령님께 의탁하면 어느 때는 버벅대는 소리로 시작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아주 맑은 천상의 소리와도 같은 아름다운 찬양이 흘러 나온다. 제가 워낙 찬양 드리기를 좋아하거든요..

 

대학생인 형제는여야님은 크신 분이시다라고 감당 할수 없는 말로 나를 놀라게 일이 있다. 정신력에 문제가 있던 형제가 교회에서 갑자기크신분이십니다하는데, 얼마나 당황하고 놀랐는지요. “장로님은 교회의 고급인력 입니다하는 말씀은 주님이 주시는 칭찬 같은 고무 되는 말이지만, 성도이면 누구나 누릴 있는 특권을 좀더 누린다고  크신 ? 분이시다한다면 말은 분명 불편한 말이다.  그런데 형제가 정신력에 문제가 있던 상태로 우리교회 목사님에게 병치료 받기 위하여  맡겼던 상태였음을 나중에야 알게 됩니다,

(1:23-24)”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같이, 교회의 장로를 향한 더러운 귀신이의 실토가 아니었나  아니었나 믿고 있습니다.

 

 

요한복음2125 말씀을 빌려 저의 증언의 참됨을 구성 합니다.

이러한 일어난 일들을 증언하기 위하여 올리는 글이 참된 알며, 성령님께서 행하신 일이 외에도 많으나,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방언이란 무엇인가?” 토론장의 공간을 모두 사용하더라도 기록된 댓글로 두기에 부족한 줄로 압니다. 할렐루야!^^

 

2.     사람이 성령 세례를 받지 않고도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들은 왜 성령 세례를 받아야만 합니까?

 

 

영생을 받는 것은 성령 세례를 받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믿음을 하여 은혜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2:4; 요한복음 6:28, 29; 갈라디아서 3:6; 5:6; 에베소서 2:8). 그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을 위해 값주고 사신 선물입니다. 우리들이 해야하는 일은 오로지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곁에서 십자가에 달려있던 회개한 행악자가 바로 그날 낙원에 있게 것을 보장 받은 것처럼 만일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들도 또한 아버지와 함께 천국에 있게 것을 보장받습니다. 어떤 사람이 “만일 당신이 방언으로 말하지 않으면 천국에 가 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 성경말씀에 위배됩니다.

 

비록 성경이 성령 세례가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와 동시에 성 경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이 그들에게 임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그의 제자들에게 명령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4:49; 사도행전 1:8). 성경은 우리들에게 “성령의 충 만을 받으라” (에베소서 5:18) 라고 명령합니다. 개인적으로 성령과의 만남은 모든 신자들 이 구하고 소중히 해야 합니다. 그것과 함께 영적 깨달음에 대한 새롭고 전보다도 충만 단계에 이르게 되며 영적 은사가 넘쳐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9-13).

 

3.     사람이 한번 성령 세례를 받으면 후에 재충만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까?

 

 

오순절날에 120 명의 제자들 (예수님을 따르는 헌신한 사람들)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았습니다 (사도행전 2:4). 이것은 며칠 전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셨던 약속이 실현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 례를 받으리라” (사도행전 1:5)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를 받을 처음 나타나 는 체험은 단지 생애를 통해서 체험하는 것의 시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마도 하나의 예는 점을 분명히 것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들은 전력을 산하는 저수지와 비교를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우리들 의 저수지 건축은 완성이 됩니다. 이제 우리들은 유용하고 삶에 영향을 미칠 있는 가능 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수지의 문이 열리고 강물이 그곳을 통하여 흘러내리기까 지는 전력이 생산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성령 세례를 받았을 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열어 드리고, 성령님은 우리 속으로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흐릅니다. 바로 때에 우리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가장 효과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저수지와 관련해서, 전력을 만드는 체험은 한번 일어나는 것으로 의도된 것이 아닙니 다. 그것은 계속 진행해 가는 과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영적 전력이 낮아질 때에 우리들은 자원으로 되돌아가서 축복하는 성령님이 우리들 가운데 다시 흘러 들어 오셔서 새로운 전력을 공급하시도록 해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초대에 예수님 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핍박이 일어났을 그들은 새로운 성령의 능력의 충만함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 들은 주님께 다시 한번 기도를 드렸으며, 그리고 나서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 습니다 (사도행전 4:31).

 

성령 충만한 신자가 주님을 섬길 때, 영적 전력의 소모가 있습니다. 그는 그의 능력을 재충

전시키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성령님께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5:18 말 씀은 문자 그대로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령 충만한 삶의 비밀이 있습 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받고 주는 것, 성령 충만함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고 복음의 사역을 위해 그것을 사용하는 것의 연속적인 과정 입니다. 

 

 

 

 

 4.     성령 세례를 받았을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 공중에서 “방언으로 말하

는 것”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또한 신자의 개인 기도 생활에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신약 성경에 의하면 알지 못하는 방언에는 가지 사용 혹은 목적이 있습니다. (1) 성령 세례의 최초의 증거로서 (사도행전 2:4; 10:46; 18:6); (2) 방언이 통역될 때에 교회의 덕 을 세우는 은사로서 (고린도전서 12:10); (3) 믿지 않는 사람들을 믿게 하는 표적으로서 (고린도전서 14:33); 그리고 (4) 효과적인 기도와 찬양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도구로서 (고린도전서 14:2, 4; 14:18). 모든 경우에 방언은 근본적으로는 똑같은 것이지만, 그러 목적은 다릅니다. 이러한 독특한 사용과 목적에 관한 오해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다란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초기의 신자들이 성령 세례를 받았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그러나 성령님께서 나누어 주 신 방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방언은 오늘날도 신자들이 성령 세례를 받을 나타나는 똑같은 증거입니다. 모든 신자들은, 그들이 성령 세례를 받을 때, 예배를 위해 교회에서 모였을 방언으로 말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증거를 가질 것이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이 방언 통역의 은사가 함께 역사하는 것을 필 요로 하는 공중에서의 방언의 은사를 행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12, 13). 처음에, 공중 예배에서 어떤 사람이 감동을 받아 방언으로 말을 합니다; 그리고 다음에 는 어떤 사람이 성령에 감동을 받아 방언의 해석을 말합니다. 영역에서 역사하시면 서, 성령님은 전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효과적이고 강력한 수단을 마련해 줍니다.

 

방언과 방언 통역의 은사의 목적은 교회의 덕을 세우며 교회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고

린도전서 14:2-12).

 

개인의 경건의 시간에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성령님의 또하나의 사역입니다. 오늘날 많 은 신자들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그들의 영적 생활을 매우 부유하게 만든다고 증거합 니다. 성령님이 예배와 사랑의 영광에 넘치는 표현 가운데 인간의 영혼을 북돋우면서 지성 한계는 극복됩니다. 제한된 어휘와 영혼의 감정과 관심을 표현할 없는 무능함의 혹함이 성령님께서 주시는 언어가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올 사라져 버립니다. 그것은 마 치 하늘과 땅이, 시간과 영원이, 하나님과 인간이 예배의 영광에 넘치는 행동을 통하여 함께 하나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방언과 은사의 사용

 

5.     성경의 기준에 의해 공중석에서 방언으로 말할 때, 항상 방언 통역이 있어 야만 합니까?

누가 방언 통역을 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4 에서 사도 바울은 신자들이 모여있는 공중석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방 언 통역이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허공에다 말하는 것” (고린도전서 14:9), “아이가 되지 말고” (고린도전서 14:20),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 하겠느냐?” (고린도전서 14:23), 그리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고린도전서 14:28) 말들을 기록한 것은 고린도에서 바로 이러한 무질서한 시행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무질서한 시행은 바울로 하여금 예언의 --- 방언을 통역하는 것이 아니라, 통역이 필요없는 방언으로 --- 우수성을 강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4:5).

 

공중 모임에서 하는 방언 통역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방언으로 말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모임 가운데 어떤 사람이 방언 통역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거 자신이 통역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고린도전서 14:13, 27, 28).

 

 

 

 

 

 

 

 

 

 

6.     방언으로 말함과 후에 따르는 방언 통역은 누구에게 유익함이 있으며,

무슨 목적이 있습니까?

 

방언과 방언통역의 목적은 가지가 있습니다. 가지 목적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믿게 하는 표적을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다른 목적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방언 통역과 함께 하는 방언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일들을 선포하고, 그의 이름을 높이며, 그리고 신자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주님을 경배하도록 촉구합니다. 그것은 또한 교회의 사명에 하여 헌신하기를 요구합니다.

 

고린도전서 14:22 계속되는 말씀에서 바울은 공중 예배에서 말했을 방언은 주로 믿 지 않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한 것이 이해가 되는데, 왜냐하면 적절하게 통역이 방언은 하나님의 장엄함과 영광에 대해서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 않는 사람은 이러한 능력에 힘입은 표현에 끌리게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 예언의 은사를 혼동합니다. 바울은 가지를 별했습니다. 그는 예언의 은사의 목적은 굳건하게 하고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라고 말했 습니다 (고린도전서 14:3, 31). 그러므로 예언은 주로 믿는 자들의 유익함을 위함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언의 말씀을 들은 믿지 않는 자들도 또한 책망을 들으며 회개하고 하나님 돌아올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24, 25).

 

 

 

 

 

 

 

 

 

 

 

7.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방언 통역이 가능합니까?

 

만일 방언 통역이 진정으로 성령의 영감으로 되었다면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결코 어긋 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방언 통역이 성경말씀에 모순이 된다면, 그것은 어긋난 것이며 따라서 그렇게 판결을 받아야만 합니다. 성경은 방언 통역을 판단하는 표준입니다.

 

예를 들면, 전에 교회의 예배 중에 “그의 (예수님의) 뼈가 부러졌다” 내용을 포 함한 예언이 주어졌습니다. 성경은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19:36; 시편 34:20) 라고 우리들에게 말씀합니다. 예언이 성경 말씀에 모순되는 것은 분명했습 니다. 방언의 통역은 성경적이 아니며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성경은 모순될 없습니다 (시편 119:89; 마태복음 5:18; 24:35; 베드로전서 1:25). 그것 완전하며, 이것들 외에 더할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2:18, 19).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들이 시행되어야만 하는 것과 관련된 지침을 확립하는 것을 주저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떠한 예언이나 말씀이나 은사의 표현은 성경과 일치해야만 하며 성경에 의해서 판단을 받아야만 합니다 (고린도전서 14:29). 예언을 말하든지 혹은 방언 통역을 동반한 방언으로 말하든지 하나님의 사자는 자신의 영혼을 제재해야만 하며 (고린 도전서 14:32) 또한 항상 성경의 진리의 지침에 따라야만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것이지만 그러나 은사들은 사람들에게 위임되었으며, 또한 그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어야만 합니다. 도자들이 확립한 적당하고 질서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고린도전서 14:33, 40).

 

 

 

 

 

 

8.     교회에서 방언과 다른 은사들이 역사할 때에 우리들이 하나의 역할을 담당

합니까?

 

하나님의 계획을 펼치는 필수적인 요소는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실 사용하실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전반에 걸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과 그러한 목적 구현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있는 사람의 존재는 명백하게 조화를 이루 었습니다. 이러한 상호관계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일관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소용에 필요한 사람이 있을 때에만 행사합니다. 은사가 자원과 역사하는 면 에서 모두 초자연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것을 나타낼 있는 자발적인 의지 와 순종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 지” (누가복음 24:49)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사도행전 2:4) 그들이 성령님께 자신을 맡긴 후였습니다.

 

아마도 성령님과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있는 사람의 존재와의 상호관계를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설명할 있습니다. 신자는 (1) 약속된 은사에 대한 성경적 토대를 분명하게 이해해야만 하며; (2) 은사가 나타나도록 열망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하고; (3) 성령님이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는 내면의 감각에 대해 즐거운 마음으로 맡겨야 하며; (4) 그러한 은 사가 행사할 있는 그의 마음과 감정, 의지, 목소리를 성령님께 제공해야만 합니다. 중요한 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는 진정한 열망을 가진 순종하는 마음을 가진 람입니다.

 

 

 

 

 

 

혼돈되는 질문들에 대한 성경적 답변들

 

9.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지 않고도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있습니까?

 

먼저 성경을 살펴 보십시다. 오순절날에 성령이 모여 있는 신자들 위에 임하여 “저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2:4). 후에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할 때에 “성령이 말씀듣는 모든 사람 에게 내려오시니” 그들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 찬양했습니다 (사도행전 10:44, 46). 또,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사역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9:6). 또한 바울 자신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 고 (사도행전 19:6) 방언으로 말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고린도전서 14:18). 이러한 성경 말씀들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 세례를 받을 때에 최초로 나타나는 외형적 증거라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초기의 신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했을 때, 그들은 다른 방언을 말했으며,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적으로 수백만의 신자들이 그들도 처음 성령 세례를 받았을 그들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했다고 그와 똑같은 증언을 합니다. 이것은 오순절 신자들이 시종 일관하게 확인하는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2:16, 17 에서 인용한 요엘 2:28, 29 예언의 말씀은 오늘날의 성령 충만함을 받은 신자들을 오순절날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과 연결시켜 줍니다.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현상에 의해 최초의 증거가 령의 충만함은 모든 사람들이 기쁨과 함께 찬양하는 공통된 체험입니다.

 

결코 방언을 해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 활력이 있고 삶을 변화시키는 성령님과의 만남에 대 해서 증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신약 성경에서 언급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경험

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 사이에는 필수적인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보여주는 형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진리에 대하 여 확신하며 또한 가르칩니다. 우리들은 우수한 영성의 증거로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라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소중한 약속이며 우리들의 삶에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커다란 축복을 놓치는 것이며 또한 성경의 형태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충만함”을 받기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은 “충만함” --- 즉,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 대한 넘치는 증거에 대해 주님을 신뢰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만 합니다.

 

 

 

 

 

 

 

 

 

 

 

 

 

 

 

 

 

 

 

 

 

 

 

 

 

 

 

10.     신약 성경에 기록된  첫번 성령이 임하였을 때에, 불의 같이 갈라지

것과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이 오늘 날에는 일어나지 않습니까?

 

오순절날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으며, “불의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사람 위에 임하여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4). 이에 앞서 최초의 성령의 부어주심을 위한 극적 환경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로지 한번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며, 그러한 일들이 사도 시대나 오늘날 우리들의 시대에 다시 일어나도록 의도된 어떤 증거도 없었습니다. 오순절날에 극적으로 표현되었으며, 초기 신자들이 성령 세례를 받았을 한결같이 일어났던 유일한 현상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성령의 부어주심은 방언으로 말하는 이외의 어떤 다른 증거도 없을 것 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영혼이 깊이 탄식하는 것을 증언 하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표현할 없는 기쁨이 넘치는 것을 증언하기도 합니다. 어떤 람들은 감정이 강하게 북돋아 오름을 체험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마치 그들의 영혼의 깊은 우물이 갑자기 열리고 찬양의 물결이 주님을 높이는 가운데 터져나오는 같기도 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넘쳐 흐릅니다.

 

성령 충만함이 오는 방법은 개인의 성격과 성령님의 창조성에 따라서 여러가지로 다양하지 만, 알지 못하는 방언은 모든 땅과 모든 세대를 통하여 성령에 충만한 모든 신자들을 연합 하는 후에 일어나는 공통된 가지 현상입니다.

 

 

 

 

 

 

 

11.     동시에 구원을 받는 것과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이 가능합니까?

 

신앙의 전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과 성령 세례를 받는 사이에 많은 시 간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은 먼저 신자여야만 합니다. 세례는 불신자 위한 것이 아닙니다.

 

첫째로, 성령님은 사람의 죄에 대하여 책망하고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나타내기 위하여 오십니다. 때에 그는 복음 사역과 기독교인의 승리의 삶을 위하여 영적 능력으로 생 활을 채우기 위해서 오십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가운데 하나는 소성시키는 것이며, 다 른 하나는 능력을 입히우는 것입니다. 가지는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논리 적으로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러나 가지가 다른 것을 바로 따라서 일어날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후에 바로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언할 수 있습니다.

 

적절히 이해를 한다면, 새로 변화를 받은 사람이 성령 세례를 받도록 인도하는 것은 매우 적절한 것입니다. “기다림”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며 기다리는) 마음의 준비 이해를 위해 흔히 필요하지만, 신자가 성령의 충만함을 빨리 받게 되는 것이 부적절 것은 아닙니다.

 

 

 

 

 

 

 

 

 

 

 

12.     고린도전서 13:8 절은 “방언도 그치고” 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은 성령 세례가 단지 2000 초대 신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까?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그것에 문맥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예언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며, 온전한 것이 오겠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8-10). 바울은 원래의 신자들에게 그리고 또한 오늘날 우리들에게 미래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나라가 시작될 때에 온전한 것이 것이며, 때 에는 이상 성령님이 주시는 지식, 지혜, 그리고 방언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이러한 역사는 오늘날 아직 필요합니다.

 

성경에는 방언이 1 세기 끝에 멈출 것이라고 하는 어떠한 암시도 없습니다. 방언은 그리스 도께서 그의 온전한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서 재림하시기까지 모든 세대에서 교회 생활의 한 부분이 것입니다. 바울의 인식은 영적 은사가 그날까지 역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7, 8).

 

 

 

 

 

 

 

 

 

 

 

 

 

13.      바울은 고린도전서 14:19 절에서 교회에서 “깨달은 마음으로 . . . 말하는

것이 . . .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라고 말했는데, 말씀은 언의  체험이 오늘날에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다음 절들에서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린도전서 14:18, 19) 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14 전체를 완 전히 검토해 보면 그렇게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라져 버립니다. 바울은 고린도교 회에서 있었던 특별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즉, 믿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방언 통역이 없이 즉석에서 방언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무질서와 어지러움 같은 것으로 취급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13, 32, 33). 그는 그가 의도하는 점을 조하기 위해서 일부러 과장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했습니다. 그의 과장은 방언의 유익함과 사용을 무효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함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그들이 어떻게 그것들을 사용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몇몇 세부 사항을 설명함으로서 방언과 방언 통역의 영적 은사를 사용할 것을 권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26-33). 또한 그는 신자의 경건 생할에 있어서 방언의 중요한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4).

 

성경적 진리가 모호해지며 무시당할 때에 사람들은 흔히 설명을 추구합니다. 방언으로 말 하는 것을 이상 체험하지 않을 사람들은 이유를 물으며, 비판하는 사람들은 특 별한 말씀을 따로 떼어 내어서 그것에 불합리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그것에 대해 답변을 합니다. 바울은 방언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18). 그의 요점은 만일 어떤 사람이 공중 배에서 방언으로 말을 하려고 한다면 듣는 사람들에게 지시하기 위하여 방언 통역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14.     오늘날 체험하는 성령의 부으심이 진정으로 성경적이라는 증거가 있습니

까?

 

 

증거는 오순절날에 성령의 부으심을 뒷바침한 것과 똑같은 증거입니다. 상황에서 사 도 베드로는 일어나서 그것이 성경을 성취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부으심을 옹호했습 니다. 그는 “이는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요엘 2:16) 라고 말함으로서 그의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체험하고 있는 것은 요엘에 의해서 예언된 것이며 오순절날에 성취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도행전과 현대에 성령의 부으심을 비교해 보면 형태와 목적이 놀라울 만큼 비슷한 것 을 보여줍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힘입은 초대 교회의 영향은 당시의 세상을 바 꾸어 놓았습니다.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오늘날 인간의 삶에도 비슷한 변화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전파됩니다. 죄인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병자는 고침 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엄청나게 증가했습니다. 비록 우리들이 기도하고 있는 모 든 범위에서의 영적 각성을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베드로와 함께 우리들은 “이는 선지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라고 말할 있습니다.

 

 

 

 

 

 

 

 

 

 

 

 

 

15.     오순절파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 12-14 장에서 오직 언급한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서 강조합니까?

 

성경에 뿌리를 내린 오순절파 신자들은 성령 세례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거듭남 (구 원) 이나 물세례와 같은 다른 교의보다 정도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방언에 대 해 성경에서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똑같은 우선 순위를 부여하면서 신약 성경의 모든 가르 침을 강조합니다. 목적은 균형을 위한 것입니다. 인정하건데, 어떤 사람들이 그러한 필수 적인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신약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을 가르치고 실행 하는 점에 있어서 균형이 깨질 때는 언제나 오순절 운동이 수난을 겪게됩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성령 세례와 그와 동행하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교의를 재발견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오순절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러한 직무에 순종하여서 오순절파 신자들은 특별한 교의에 대하여 높은 우선 순위를 두어왔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불균형은 실제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습니다.

 

 

 

 

 

 

 

 

 

 

 

 

 

 

 

성령 세례 받기

 

16.   누가 성령 세례를 받아야만 합니까?

 

 

오순절날에 신자들이 기도하려 모였을 때에 저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2:4). 사람도 빠 지지 않았습니다.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단지 사도들만이 아니라 120 모든 사람이 충만 함을 받았습니다. 다음에 사도 베드로는 주위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설교를 하 면서 그들이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 든 사람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사도행전 2:39) 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말했던 것처럼, 성령 세례는 모든 세대에 모든 신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보편적 차원에서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약속입니다. 성령 세례는 모든 기독교 신자들에게 약속입니다.

 

 

 

 

 

 

 

 

 

 

 

 

 

 

 

 

17.   사람들이 성령에 충만함을 받을 그들은 절반은 의식이 없는 상태입니

까?

아니면 그들은 완전히 정신이 있으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의식하고 있습니까?

 

신자가 성령 세례를 받을 때에 그것을 동반하는 현상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성경을 통해 볼 때 분명합니다. 흥미롭게도, 오순절날에 최초의 성령의 부으심을 목격한 무리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120 그들을 “조롱”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저희가 술에 취하였다” (사도행전 2:13) 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때가 제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사도행전 2:15, 16) 라고 설명했습니다.

 

요점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성령님의 찾아오심에 대하여 인간의 극적인 반응이 있었습니 다.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술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때에 때때로 이와 비슷한 행동을 보여주지만, 그러나 자들의 경험은 매우 광범위합니다. 어떤 사람은 감정이 전혀 혹은 거의 동요됨이 없이 만함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험은 진정하고 사실적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매우 압도되어서 “성령 안에서 잃어버린” 자가 되었으며 얼마동안 주위를 망각하였습니다.

 

충만함을 갈망하는 신자는 각각 성령님에게 완전히 굴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오는 현상들은 성령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서 정해졌습니다. 그러나 항상 강조해야 하는 점은 감정적 체험보다는 내면의 충만함입니다. 감정적 체험을 추구하는 것은 성령님의 진정한 역사하심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극단은 피해야만 합니다. 인간의 영혼을 겉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성령님의 내적 역사는 모든 갈망하는 마음의 초점이 되어야만 합니다.

 

18.   어떤 사람은 즉시 성령 세례를 받으며, 어떤 사람들은 오랫동안 갈망하

여도 받지 못합니까?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게 “너희는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며칠 후에 그들은 성령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2:4). 이에 앞서 주님은 “내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 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성에 유하라” (누가복음 24:4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심 할 여지없이, 제자들은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남아서 많은 시간을 기도에 힘썼습니다. 성령님이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일단 성령님이 찾아 오셨 을 떄, 이상 “기다림”이나 “늦어짐”은 없었습니다. 성령님이 채우시기를 위해 마음을 비하는 것과 연관한 “기다림” 이외에는, 오늘날은 이상 기다릴 이유가 없습니다.

 

어떤 신자들은 세례를 즉시 받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다양한 시간 동안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럴까요? (1) 왜냐하면 성령님은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자신 하나님의 통제하심에 맡기기 위해서 준비하기 전에 기다림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2) 채우심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기다리는 경이적이며 의미있는 시간 후에 찾아오는 세 례의 과정을 포함할 있습니다. 갈망하는 사람은 “기다림”의 시간이 어떤 것이라 할지라 오로지 그것은 그들의 가운데서 성령님의 충만히 부어주심에 가까이 가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19.   개인이 성령 세례를 받기를 원할 성령 충만함을 빨리 받기 위해 개인의

생활이나 주위 환경에 대하여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을 자주 듣습니다: “성령 셰례를 받기 위해서 나의 삶에서 내가 있는 엇이 있습니까?” 신자가 해야만 하는 가지는 성령 세례를 구하기 보다는 성령 세례를 주시는 분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성령 세례를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 다. 성령 세례를 갈망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체험보다는 예수님에게 그들의 관심을 집중해 야만 합니다.

 

이밖에도 다음과 같은 것들을 실행한다면 도움이 됩니다. (1) 성령 세례는 하나님이 주시 선물이라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그것은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 받아야만 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했기 때문에 얻을 있거나 또는 무엇을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열린 마음, 자발적인 마음으로만 받을 있습니다.

(2) 성령 세례는 성경적으로, 그리고 교리적으로 올바른 것이라는 것을 완전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3) 당신의 삶에서 기억하는 모든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의로운 삶 을 살것을 결심하십시오. (4) 찬양과 경배로 주님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십시오. (5) 세 례를 주시는 주님께 그의 영광을 위하여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갈망하십시오. (6) 당신 영혼의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것에 순종하고, 내적 용솟음이 당신에게는 알려 지지 않은 말이나 하나님께는 의미있는 말로 예배, 찬양, 그리고 경배를 표현하도록 허용 하십시오.

 

20.   방언이 성령 충만함에 대한 유일한 증거입니까?

성령 세례를 받은 후에 사람의 태도나 행동에 어떤 의미있는 변화가 습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최초의 외형적 표적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 와 같이, 이것은 일관성을 가지고 계속해서 일어나는 하나의 외형적 표적입니다. 그러나, 세례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수단입니다. 그것은 성령 충만한 삶으로 가는 문입니다. 그 것은 시작이며 끝이 아닙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오직 최초의 증거이며, 일관된 성령 충만한 삶을 표시하는 그리스도를 닮은 모든 증거들로 뒷받침 되어야만 합니다.

 

성령 세례는 신자의 가운데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5:22, 23 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 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로 묘사한 것과 같은 성령의 열매가 증가하게 것입니다.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냥 하나의 체험이 아니라 그렇게 사는 삶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러 한 필수적인 구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성령님께서 충만함 가운데 찾아오셔서 다른 방언으로 주님을 찬양하신 놀라운 순간을 기억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시점을 계속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비극입니다.

 

질문은 “당신은 성령 충만한 적이 있습니까?”가 아니라,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 당신은 어 떻게 살아왔습니까?” 입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할찌니” (갈라디아서 5:25) 라고 기록했습니다. 성령 세례는 성령님 안에서 승리에 독교인의 삶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보다 못한 어떠한 결과는 놀라운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에 부족한 것입니다.

 

저자: Rev. Richard Dresselhaus

옮긴이: 기환 목사

 

 

 

하나님의 성회 우리들의 특유의 교의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성회 출판부의 출판물임.

Gospel Publishing House, 1445 Boonville, Springfield, MO 65802

 

Title: Our Distinctive Doctrines.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한국어판) Copyright date: August 2, 2007

Used by permission from the Gospel Publishing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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