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에 대한 성경적 관점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 2018. 11. 25. 17:30

낙태에 대한 성경적 관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법률에서 낙태라는 용어는 유산을 조장하는 범죄임을 암시하였다. 낙태 시술자는 낙태죄를 시행하는 사람이었다. 오늘날 낙태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 말은 태어나지 않은 아기를 죽이는 합법적인 시술로 즉각 떠오른다. 요구에 의한 낙태가 합법화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여전히 부도덕한 것이며 죄이다. 


의학적인 정의의 변화


친 태주의자들은 요구에 따라서 낙태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였다. 그들은 태어나지 않은 아이와 낙태시술을 묘사할 때 그 시술이 흉하지 않게 보이는 표현을 채용하였다. 


에버트 쿱(Everett Koop) 박사는 미국 공중 위생국 장관이다. 그가 펜실베니아 어린이 병원 의과 과장과 펜실베니아 대학의 의과대학 소아과 및 소아외과 교수로 있을 때 “한 인간으로서 낙태가 태어나지 않은 아기에 대한 살인이라고 알았던 우리는 ‘수태의 산물’이나 ‘태아’의 파괴가 태어나지 않은 아기를 죽이는 것과 같지 않다고 믿도록 세뇌되었다. 전통적인 의학적 정의는 낙태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불쾌감을 없애기 위하여 신중하게 변질 되었다.ⓐ 고 썼다. 


친 낙태주의자들은 낙태과정을 임신을 종결시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중단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자궁의 내용물을 제거하는 것” 혹은 “임신부 생식력 내용물”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태어나지 않은 아기가 출생 전에 사람의 기관을 갖추고 있고 살아 있을 때에도 “잠정적인 인간 생명”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생명은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만나서 새로운 살아있는 인간을 형성하기 전에만 잠정적인 것이다. 


크리스찬은 부정확하고 거짓된 의학용어에 의해서 속아 넘어가서는 안될 것이다. 신자들은 반드시 성경적 원리의 가르침에 의해서 인도받아야 한다. 


태어나지 않은 아기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는 것 


어떤 사람은 태어나지 않은 아기가 자궁 밖에서 생명을 지속할 수 있기 전에 행하는 낙태를 정당화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성경 생명의 과정에서 그러한 구분을 하고 있지 않다. “생존할 수 있는 태아”라는 용어가 과학적인 사실로서 생명이 자궁 밖에서 지속될 수 잇는 시간을 적절하게 지시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한 인간으로서 생명이 그 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인시켜 주지는 못한다. 초기 단계에 행하는 합법적이라고 선언되었기 때문에 초기에 낙태를 하도록 유혹을 받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성경적인 진리를 고려함으로써 도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 성경은 이미 임신 초기에 있는 여자를 아이와 함께 있다고 인정한다.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로 선택되었을 때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라는 말이 드려왔다.(눅 1:31) 그리고 그 천사는 마리아에게 그녀의 사촌 엘리사벳도 임신하였다고 알려 주었다.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눅 1:36) 여기서 사용된 말을 보면 성경은 태어나기 3 개월 전임에도 불구하고 태중에 있는 세례 요한을 아들로 이정하였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눅 1:41,44 에서 요한은 출생 전에 아이로 인정되고 있다. 이것은 출생 전과 출생 후의 아이에 대한 헬라어를 번역한 것이다.(행 7:19) 마리아가 아들을 배었다는 말은 마리아가 비록 임친 초기에 있지만 예수를 아들로 인정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성경은 항상 출생하기 전의 생명의 상태를 의미없는 수태의 산물로서가 아닌 한 아이의 생명으로 이정한다. 거기에서 태어난 아이와 태어나지 않은 아이 사이의 생명에 대한 가치의 구분이 없다. 


성경 시대의 임신이 불법적인 관계에 의한 것일 경우일지라도 그 생명에 대한 가치는 의문시 되지 않았다. 롯의 딸들은 근친상간에 의해서 임신되었지만(창 19:36) 이것은 낙태가 요구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밧세바는 간음에 의해서 임신된 것을 알았지만(삼하 11:5) 이것을 여자의 자궁에서 제거되어야 하는 단순한 부가물의 골칫거리로 보지 않았다. 


요한 칼빈은 출 21:22,23 에 대한 주해에서 낙태에 대하여 매우 의미있는 관찰을 하였다. “태아는 비록 어미의 자궁 안에 싸여 있지만 이미 인간이다. 그리고 그 태아가 즐기기를 시작도 아니한 생명을 빼앗는 것은 엄청난 죄악이다. 사람의 집이 가장 안전한 피난처이기 때문에 사람이 들에서 죽이는 것보다 자기의 집 안에서 죽이는 것이 더 끔찍한 일이라면 태아가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자궁 안에서 죽이는 것은 확실히 더 잔악한 일로 생각된다.”ⓑ


2. 성경은 하나님이 새 생명을 형성하는 창조적인 과정에서 활동하고 계심을 인정한다. 임신을 유산시키는 것은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일을 유산시키는 것이다. 


야곱의 아내인 레아에 관하여 성경은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창 29:31,32)라고 가르키고 있다. 


욥이 자신을 그의 종들과 비교할 때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배 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욥 31:15) 하나님의 공정성을 지적할 때 욥은 “왕족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며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더 생각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니라”(욥 34:19)고 말했다. 이사야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때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리로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사 44:2)고 기록했다. 그리고 또 다시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조성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사44:24)고 하였다. 


다윗은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우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기록이 다 되었나이다.(시 139:13-16)라고 기록하여 그것을 잘 요약하였다. 


시 139-13-16 에 관하여 슈메이커(Donald Shoemaker)는 “이 구절은 탄생하지 않은 생명에 대한 거룩한 경고와 존경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 우리가 이것을 볼 때에 우리는 경배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서 있는 그 곳은 거룩한 땅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신적 기원에 대한 이와같은 존경심을 친 낙태주의자들 가운데서는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의 것은 복스러운 창조자의 창조물을 훼방하고 파괴하려고 하나님의 실험실로 뛰어든 부정한 침입이다. 하나님은 태아를 사랑하신다. 이 시편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잊지 못하게 할 것이다.” ⓒ


사람들이 출생한 후에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은 또한 출생 전에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또한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출생과정에서 창조적으로 활동하신다. 그리고 임신을 종결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작품을 파괴하는 것이다. 낙태는 전능자에 대한 악한 사람의 반항이다. 그것은 한 사회의 타락한 정도에 대한 표시이다. 


3. 성경은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 대한 계획을 하나님이 갖고 계심을 인정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새 생명의 잠재력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그의 예언사역으로 부르셨을 때 그 구별이 그가 탄생하기 전이었음을 지적하셨다. “내가 너를 복중에서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 1:5) 


제사장 스가랴가 향단에서 심기로 있었을 때 한 천사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요한이라고 하는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전해 주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아이에 대하여 분명한 계획을 갖고 계심을 보여주셨다. 요한은 예수의 앞길을 준비하는 자가 될 예정이었다.(눅 1:11-17)


태어나지 아니한 아이의 생명을 죽이는 것은 그 생명에 대하여 하나님이 갖고 계신 계획을 극악무도하게 무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태어나지 아니한 인간에게서 하나님 계획의 도구가 되고자 하는 선택의 특권을 빼앗는 것이다. 


4. 성경은 하나님의 태어나지 아니한 아이의 생명의 가치를 포함한 모든 것의 주권

자임을 인정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부할 때 결국 그들은 인간의 생명을 상대적으로 만든다. 어떤 생명은 가치가 있고 어떤 생명은 버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나치 전범자들에 대한 뉴렘버그(Nuremburg) 재판의 정신과 의사요, 하버드 대학의 레오 알렉산더(Leo Alexander)의 연구는 대학살의 시작이 어떤 인간의 생명은 존재할 가치도 없다는 신념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신념의 결과 그들은 결함이 있는 사람, 절름발이, 불구자, 장애자 심지어 1 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을 위해서 싸우다가 불구가 된 퇴역군인들까지도 죽였다. 그러나 그것은 대학살의 작은 단계일 뿐이었다.“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놓고 한 생명이 탄생전이든지 후든지 살 가치가 있는지 결정할 때 그들은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유한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하나님의 길은 사람의 길보다 높다. 오늘날 의학기술의 발달로 태어나지 아니한 아이가 좋지 않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였지만 이러한 아이도 여전히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세가 자기의 말재주 없음을 불평하였을 때 하나님은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여호와가 아니뇨”(출 4:11)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가치없는 생명을 구성하는 것들에 대한 기준을 세울 때 그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 이외에 누가 대학살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 가운데 암에 대한 치료법을 발견할 수 있었을 사람이 있었는지 알겠느냐? 하나님 외에 누가 탄생전에 죽임을 당한 수백만의 아이들 가운데 인생의 질을 개선하기 위하여 어떤 축복을 줄 수 있었는지 알겠는가? 

하원의원들 앞에서 행한 감동적인 연설 가운데 아래에서 인용한 것은 강간의 결과로서 태어난 사람이 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사생자를 포기한다. 나는 항상 나의 근본을 생각한다. 그것은 나를 숨기지 못하고 나의 피부색깔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가난한 가운데 태어났다. 나의 아버지는 나의 어머니가 12 살 때 그녀를 강간하였다. 이제 그들은 펜실베니아의 체스터에 나를 위하여 한 공원을 명명하였다.ⓔ

위의 인용문은 복음성가를 통하여 수백만의 사람들이 섬기는 에텔 워터스(Ethel Waters)가 한 말이다. 만일 그 당시 낙태가 합법적이었다면 누군가가 그것을 제의했을 것이다. 만일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이 세상은 더욱 영적인 가난에 처해 있었을 것이다. 복음전파 사역에서 이 위대한 복음성가 가수를 잃을 뻔하였다. 

임신이 산모의 생명을 위협할 때

예전에는 산모가 임신의 결과로 죽는 일이 있었다. 오늘날은 의학의 바달로 인하여 그런 상황은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상황에 부딪치게 되고 치료를 위해 기도한 후에도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 가운데 기적적인 간섭을 행하시지 않을 때는 여기에 관련된 사람들은 더욱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바라 볼 필요가 있다. 또 생명을 중요시하는 의사의 진찰은 적절한 결론에 도달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무죄한 자를 죽이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

하나님의 말씀은 무죄한 사람의 생명을 취하는 것에 관하여 매우 명백하다. “살인하지 말지니라”(출 20:13)는 십계명 가운데 하나 일뿐 아니라 성경에 자주 번복되는 명령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법을 세우라고 명령하셨는데 이것을 태어나지 아니한 아이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낼 것이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며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을지니라”(출 21:22-24)

하나님의 성회 신학교의 구약 및 히브리어 교수인 스텐리 홀톤(Stanley M Horton)박사는 출 21:24-25 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의견을 말하였다. “여기서 상황은 말다툼의 결과로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이다. 똑같은 히브리어 동사가 출 2:13 에서도 사용되었는데 그것을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모세가 본 것이다. 어쨌든 두 사람이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때리게 되어 아이가 나오게 된 것이다. 즉 미숙아를 낳은 것이다. 만일 아이나 산모에게 해나 치명상이없다면 그 여인을 친 사람은 남편의 청구와 재판관의 판결을 따라 벌금을 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산모나 아이에게 죽음을 야기시키는 치명상이 있으면 생명에는 생명으로의 법이 적용된다.” 

“그녀의 열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옐라데하(yeladeha)인데, 이는 구약성경 다른 곳에서 사용된 것처럼, 같은 장(4 절)에서 “그녀의 자녀들”이라고 번역되었다. 여기서는 복수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태 안에 한 아이 이상이 있는지 미리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손”인데 창 42:4 에서 사용되었다. 여기서 야곱은 베냐민에게 무슨 일이(그가 요셉에게 일어났다고 생각되는 일) 즉 죽음이 닥칠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창 42:38, 44:29 참조) “이로 보건데 태아는 한 어린 아이로 이정되며 나이먹은 아이와 똑같은 권리를 지닌다는 것은 명백하다.” 무죄한 자를 죽이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명확하다. 재판관의 과정을 통하여 명령된 사형이나(민 35:12), 정당방위와 관련된 밤에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일어난 살인(출 22:2)등은 제외하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아무도 죄없다고 하지 못한다. 

관심있는 크리스찬과 낙태 문제

편의를 위해서 마음대로 낙태하는 악이 고려될 때 관심있는 크리스찬들은 다른 악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행동을 보여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크리스찬들이 부도덕한 경향을 억제시키며 가능하다면 역전시키기 위하여 취할 수있는 단계들이 있다. 

1. 크리스찬들은 사람들의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간섭이 있도록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쇠퇴하는 국가적이 도덕 기준을 향상시키며 그 결과로 편의를 위해서 마음대로 행하는 낙태와 같은 악을 허용하는 법을 제거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영적 각성의 능력은 역사적으로 볼 수 있다. 불란서와 영국은 둘 다 18 세기에 혁명이 있었다. 불란서는 정치적인 혁명이 있었는데 그 결과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피흘림이 있었다. 영국은 산업혁명이 있었다.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은 영구에서는 영적 각성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 땅에서 생활의 질적 수준을 높였고 불란서가 경험했던 것 같은 폭력적 혁명을 피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영적 각성이 있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도덕적 분위기에 유익한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생명의 존엄성이 경외 받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 기준들도 향상되어야 할 것이다. 

2. 관심있는 크리스찬은 모든 가능한 장소에서 성서적인 도덕적 교훈을 제공하는 일을 도와야 한다. 인본주의적 심지어 무신론적 철학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교회의 기준 대신 하나님 말씀의 영원한 진리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교회가 사회의 기준을 높일 수 있다. 사람들이 피상적인 인간 이론에서 출발한 상대적 가치보다 성경의 절대성을 받아들일 때 모든 생활 수준들이 급격히 개선될 것이다. 

의에 대한 성경적 기준을 무시하는 것이 죄라고 인정될 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죄라고 인정될 때, 그리고 예수의 구원과 주 되심을 거부하는 것이 죄라는 것이 인정 될 때 사회의 상태는 크게 호전될 것이다. 그리고 낙태와 같은 문제는 크게 감소할 것이다. 

성경적인 교훈은 교회와 가정에서 적절하게 가르쳐져야 한다. 신자들은 성경에 깊이 뿌리를 내림으로써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확신에 대한 이유를 말해 줄 수 있어야 한다. 

3. 관심있는 크리스찬은 원치않는 임신을 한 사람들에게 입양과 같은 대안에 대
하여 상담을 해주어야 한다. 그들은 기독교 기관을 지원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아이를 입양시키는 것을 포기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사랑
하는 자세를 가지고 도와주어야 한다. 이러한 부모들은 매우 당황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4. 관심있는 크리스찬은 적극적으로 생명을 중요시하는 법률제정을 지원하고 사회의 도덕을 파괴하려고 하는 어떤 법률도 반대해야 한다. 이 나라의 시민으로써 그들은 정부 대표들에게 그들의 인격을 표현해야 한다. 그들은 공적인 지위에 앉을 사람들을 결정하는 일에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들은 헌신된 크리스찬들이 영향력 있는 위치에 가도록 격려해야 한다. 

5. 관심있는 크리스찬들은 낙태를 했거나 낙태하는 일에 참여했던 일 때문에 무거운 후회나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도움을 주어야 한다. 이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예수께서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고 하신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주 안에서 강한 자들의 기도와 도덕적 지지를 필요로 한다. 

ⓐ C. Everett Koop, "A Physician Looks at Abortion, in Thou Shall Not Kill,
ed. Richard L. Ganz (New York: Cor 주 Publishiers, Inc., 1978)
ⓑ John Calvin, Commentaries on the Four Last Books of Moses, Trans,
Charies Willian Bingham, 4 vols, (Grnad Rd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50) 3:42
ⓒ Donald Shoemaker, Abortion, the Bible and the Christian (Grand
Rapids:baker Book House. 1976)
ⓓ Frnacis Schaeffer and C. Everett Koop, Whatever Happened to the
Humand Race? (Old Tappan, NJ:Flemming H. Revell co., 1979)
ⓔ Thomans J. Bliley. Jr., of Vlirginia, Congressional Rdcords, Extension of
Remarks (Washington, D, C., House of Representative, July 25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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