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렇게 믿는다 (머리말 & 성경의 무오성)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 2018. 8. 27. 23:02우리는 이렇게 믿는다
하나님의 성회 한국총회
머리말
이 책에서 다루는 문제들에 대한 성명들은 하나님의 성회의 집행기구인 총대 회에 의하여 지난 20 년에 걸쳐서 하나님의 성회의 공식 성명으로서 인준되었다 (아래에 기록된 날짜들은 인준된 해를 가리킨다). 논쟁이 되고 있는 문제에 대하 여 입장을 밝힐 필요성이 생김에 따라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인준을 받기 위해 총 대회의에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이 성명서들은 총회 입장을 밝히는 보고서로 인 쇄되었다. 이것들은 이제 책자로서도 구입할 수 있으며 보다 편의를 위해서 낱장 으로 제본된 책(looseleaf format)으로도 구할 수 있다.
성경의 무오성 (1970)
제1장 성경의 무오성
우리는 성경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영감으로 우리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계시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과오가 없으며 오류가 없다.
성경의 의도
1. 우리는 원본을 참조한다. 본문비평학은 원문이 신빙성이 있음을 확인해 주고 있으며 성경의 무오성은 원문에만 한 한다고 말한다.(렘36:2)
2. 우리는 성경이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기자의 마음에 생각을 넣어주셨다.(암3:8)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도록 인도하셨다.(출4:12, 25)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이러한 말씀을 읽는 독자의 마음에 조명하심으로 독자가 기자의 마음에 있던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하신다.(고전2:12, 엡1:17, 18) 이와같이 사상과 언어는 계시와 영감으로 된 것이다.
3. 우리는 영감이 성령의 특별한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며, 영감에 의해서 성령은 성경의 기자들을 인도했다고 본다. 이와같은 성령의 감독은 기자들의 다양한 배경, 능력, 개성들을 전적으로 포용했고 성경의 정경에 나타낸 것처럼 그들의 쓴 모든 것에 적용된다.
4. 우리는 “무오성”을 “과오로부터 면제된” 뜻으로 정의하며 “무류성”은 “과오를 범할 수 없는 확실한” 뜻에 근사한 것으로 정의한다. 이 두 단어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무오성은 성경의 진실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무류성은 성경의 신뢰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오성과 무류성은 모든 성경에 적용 되며 계시적인 무오성과 사실적인 무류성을 포함한다. 성경은 진리이다.(시 119:34,160, 요17:17,19, 골1:5)
역사적 고찰
성경의 무오성의 교리에 대한 논쟁은 주로 최근에 있었던 현상이지만 교회사를 살펴보면 성경의 무오성의 교리와 함께 영감설에 대한 확실한 입장을 오랫동안 고수해온 것을 알 수 있다. 교부시대에는 성경이 신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성령의 독특한 저작품으로 간주되었다. 교부들에게 있어서 영감은 성경의 문체까지도 포함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마 5:18의 그리스도의 말씀을 강조하고 있다.(Protepticus, IX, 82, 1) 그레고리 나지아누스(Gregory Nazianus)는 성경의 작은 선까지도 성령에 의도가 있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의미에 대해서도 주의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권면한다.(Oat., 2, 105) 순교자 저스틴은 인간과 하나님의 영감을 구분했고, 성경 기자들을 감동시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말했다.(Apology I. ch. 36) 이레니우스 성경을 허위가 전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Apology, ch, 18) 초대 교부들이 성경의 영감설을 믿었으며, 성경의 세세한 것까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것이라고 믿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중세 혹은 스콜라학파 시대에는 성경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논쟁을 위한 자료집 정도로 전락하였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영감설에 관한한 비생산적이었다. 이 당시는 교회내의 다른 권위들과 성경의 위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하여 훨씬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다. 비록 아벨라드와 아퀴나스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게 되는 인간적인 요소를 강조하기는 했지만 중세시대의 분위기에 의해서 영감설이 손상을 입었다고 할만한 증거는 없다. 개혁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성경의 영감설을 채택하였는데 그 안에는 성경의 무오성의 교리가 포함되었다. 쯔빙글리는 순수한 기독교 교리를 변호할 때 지속적으로 구약과 신약을 인용하였다. 칼빈은 성경을 하나님이 바로 그 저자라고 완전하게 확인할 때까지 하나님의 진리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남기기를 기뻐하신 유일한 기록이라고 기술하였다.(Institutes, I, 7, 2, 4) 루터는 영감설을 지지하였으며 정경성 문제가 해결되자 성경을 오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개혁자들이 영감설의 주제에 대한 신학에 몰두했다고 할 수 없어도 성경의 권위를 전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성주의 시대에는 성경의 세세한 것까지 영감설을 적용하는 것이 공격을 받게 되었다. 문예부흥의 정신에 의하여 언어학적이며 본문에 의한 연구가 홍수를 이 루었다. 이성주의적인 접근방식으로 성경의 본문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고 하여 성경의 영감설이 와해될 위기에 처했었다. 이러한 생각은 성경이 오류로 가득 찼다고 하는 주장에 불을 지르게 되었으며 따라서 비판자들은 영감설의 교리를 무너뜨리려고 하였다. 불행히도 정통주의는 똑같은 이성적인 방법으로 반발했다. 그들은 성경은 오류가 없으므로 영감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우리가 낮은 견해의 영감설을 용납 해야 한다거나, 무오성의 교리를 배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장이 단지 성경에 요구하는 것과 부합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성경 은 오류가 없기 때문에 영감을 받은 것 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고 해야 옳다. 만일에 성경이 오류가 없기 때문에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성적인 사고방식이며 인본주의적인 사고에 문을 열어주는 것이 되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영감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성서적이며 영감설 및 무오성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갖게 할 것이다.
주석학적 고찰
무오성의 교리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한 시발점은 성경 스스로의 증거이다. 성경은 스스로 신적 권위와 충만한 영감을 분명하게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 안에 는 무오성의 교리를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신뢰할만한 증인이며 사자인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세세한 것까지 영감에 의한 것임을 단언하였다. 마 5:18 에서 예수님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였다. 우리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점은 히브리어 글자중 가장 작은 것이며 획은 글자와 글자간의 차이를 분간하기 위해 긋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의미상으로 받아들인다면 일점일획은 성경의 세미한 부분을 가리키지만 의미는 같다. 예수님은 성경을 하찮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일관성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만일 예수께서 성경의 완전한 영감 과 무오를 믿지 않았다면, 그의 논쟁은 의미가 없다. 성경은 각 부분의 기본적인 특성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장은 요10:34,35 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시편의 말씀을 가리키면서 율법의 어느 한 부분만 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음을 증거한다. 만일 예수께서 성경이 부분적으로만 영감을 받은 것이며 어느 부분에서는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여기서처럼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마22:32 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정당한 이유는 성경의 자세한 부분 즉 현재 시제를 사용한 것에서도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이라는데 근거를 두고 있기 때 문이다. 마22:43-35에서 바리새인들에게 한 질문에서 대화의 강조는 “주”라는 한 단어의 사용에 있다. 갈3:16 에서 사도바울은 그의 논쟁점을 강조하기 위하 여 단수와 복수를 구분하는데 의존하고 있다. 시제, 특별한 단어, 단수와 복수 등 세세한 예증들은 성경이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오류가 없이 완전히 영감으로 된 것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성경의 완전 영감에 대한 가장 강력한 말씀 중에서 딤후 3:16이 있다. 이 구절 은 성경전체 혹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 혹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으신 (Breath out of God)것임을 가르친다. 이 구절은 번역할 때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 이라고 하거나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고 해도 의미는 똑같은 것이다. 한 성경에서 진실한 것은 성경전체 혹은 모든 성경에 대해서도 진실한 것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독특한 저작품이다. 마지막으로 고려해 볼만한 구절이 있다. 벧후1:21은 구약의 기자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대로” 말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인간의 영감된 말과 비교해 볼 때, 이 문맥에서 이 구절은 성경의 독특성을 제시해주고 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성령에 의해서 감동되었고 움직여졌다. 성경 자체의 변함없는 증거는 명확하다. 즉 하나님이 기자의 마음에 개념을 말씀하였고(계시), 성령은 이 개념을 객관적인 언어의 형태로 전달되도록 인도하셨고(영감), 성령의 지속적인 인도를 통하여(조명)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원래 계시된 것을 받게 된다. 이상의 구절 외에도 성경이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구약에 보면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라는 구절이 무수히 많다. 다른 구절에 보면 성경을 하나님의 권위와 직접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을 보게 된다. 즉 “말씀하시기를” “기록되었으되” 그리고 “경에 이르기를” 등이다. 이것은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기록된 성경과 동일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오성의 교리에 대한 반대 의견
1. 우리는 원본을 갖고 있지 않음으로 무오성의 교리는 가치가 없다. 이에 대한 답변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유능한 학자들에 의하여 발달한 본문 비평학은 우리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본문(헬라어, 히브리어)이 의미상 잘못이 없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연구하는 본문은 신뢰할만하며 주의깊고 세심하게 연구할만하다. 둘째로, 만일 무오성의 교리를 배척한다면 진리에 대한 의문이 객관적인 것으로 주관적인 것으로 옮겨가게 된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어느 부분이 옳고 어느 부분이 잘못된 것이라고 누가 결정 할 수 있는가? 어느 부분이 신뢰할 만하며, 어떤 부분이 무가치한 것이라고 누가 단정할 수 있는가? 우리가 성경을 이성주의 아래 두거나 사람의 평가에 맡긴다면 성경이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성경의 주장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
2. 무오성의 교리는 성경을 저술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개성을 제거하는 영감과 교리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성령의 감독에 의해서 하나님의 그의 말씀을 기록할 사람을 준비하셔서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대로 정확히 기록할 수 있게 하셨다는 주장을 견지한다. 각 저자의 모든 개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성경에 의하여 사용되어 다양성과 개인적 특성이 허용됨과 동시에 하나님이 저자에게 맡기기를 원하시는 말씀의 내용을 파괴시키지 않게 하신다.(벧후1:21)
3. 성경은 과학, 역사, 윤리, 추론, 인용 등에 있어서 오류를 안고 있다. 그러므로 신뢰할 수 없다. 첫째로 이것은 가장 보편적인 주장인 반면에 실증하기 매우 어려운 것이기도 하나 과학과 시간은 항상 성경의 진실성을 입증해 왔다. 둘째로 성경은 종교적이 아닌 주제에 대하여 교재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성경이 이러한 영역 안에서 말할 때 성경의 진술은 비록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하였고 불완전하지만 그 진술은 오류가 없다.
4. 셋째로 성경은 그 당시의 배경과 함께 연구해야 한다. 문화, 언어, 문화적 진행 등의 문제를 주의 깊게 고찰해야 한다. 만일 신실하고 지성적인 연구자세로 성경에 접근한다면 성경이 무류성을 갖춘 것임이 드러날 것이다.
5. 영감설에 대하여 확실한 입장을 가진다면 무오성의 교리는 불필요한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3 가지 방향으로 해야 한다. 보다시피 역사의 증언은 설득 력이 있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영감설과 무오설을 분리시키지 않은 채 영감설에 대하여 강한 자세를 유지해 왔다. 둘째로 성경을 연구하면 영감설과 무오설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음을 발견한다. 성경의 기자들이 성경을 단순히 무오하거나 무류한 어떤 책이라고 생각했을 것 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논리적 접근방식이다. 하나님은 성경이 증거한 대로 잘못을 범하실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시31:5, 100:5, 요7:28, 8:26, 롬3:4, 고후1:18, 요일 4:6, 5:20, 계6:10)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진리를 나타내시기 위한 도구로 사람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경을 만드는 작업을 주관하셨고 모든 오류를 피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은 모순이 없다. 그러나 작은 부분일지라도 오류가 있 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모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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