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성령론_ 하나님의성회는 영적 전쟁을 믿습니까?

성인성경학교 2025. 3. 16. 13:08

하나님의성회는 영적 전쟁을 믿습니까?

기독교인들은 어느 정도로 사단과 악의 세력을 찾고 그에 대해 권위를 가져야만 합니까?

 

하나님의성회는 영적인 전쟁에 대해서 믿는데, 왜냐하면 성경이 그것에 대해서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에베소서 6:10-12).

 

그러나 하나님의성회는 선의의 마음을 가졌으나 비성경적인 영적 전쟁에 대하여 잘못된 옹호를 하는 어떤 사람들이 정의하고 실행하는 영적 전쟁에 대해서는 믿지 않습니다. 그러한 어떤 사람들은 성경 구절을 선택하여 그것의 문맥에 맞지 않게 혹은 극단적인 해석을 하면서 성경에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는 의미를 넘어 다른 뜻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또한 다른 성경 구절들이 그와 같은 강조를 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경우를 사용하여서 기도나 사단과의 전쟁에 대한 어떤 유형을 만듭니다.

 

 땅에서 사역하는 동안에 예수님은 악한 영이 들려 육체적으로 연약하게 된 자로부터 악한 영을 쫓아내어 그를 자유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는 죄를 범하거나 귀신들린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원인 때문에 연약한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예: 요한복음 9:2, 3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영적 전쟁을 잘못 해석한 사람들은 극단적인 경우에는 신자가 다니는 모든 곳에 귀신이 역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전에 지난 번에 성도들이 모 후에 그 건물에 들어왔을 수도 있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예배와 덕 세움을 위하여 모일 때에 대한 성경에 기록된 유일한 유형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다른 어떤 권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합니다.

 

영적 전쟁에 대한 다른 오해는 베드로전서 5:8을 문맥에 맞지 않게 선택하여서 성경이 말씀하는 것과는 달리 사단에게 능력과 무소부재함을 부여하도록 사용하는 것입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라고 하는 말씀은 불길하게 들립니다. 그리고 마귀의 일은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은 사단에 대한 우리들의 권위를 적절한 관점에서 보여줍니다.

 

(베드로전서 5:9”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기독교인의 일상 생활은 모든 삶 가운데에서 마귀를 장황하게 꾸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에 굳게 서서 신자들을 교활하게 유혹하는 마귀의 유혹에 대적하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 이상을 하는 것은 사단에게 그의 가치 이상의 더 많은 크레딧을 주는 것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누가복음 10:19)”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을 무소부재한 사단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의 근거로 삼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무소부재하십니다. 비록 이 세상을 채울 수 있는 많은 악령이 존재한다고 생각되지만, 사단과 그의 추종자들은 제한적이어서 한 번에 한 곳에만 머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에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욥기 1장에는 성경에 직접적으로 많이 언급되지 않고 있는 영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한민족의 단국신화를 보면 웅녀라는 단군의 어머니가 등장하는데 그 웅녀는 원래 곰으로, 사람이 되고자 환웅에게 빌어 시험을 통과한 뒤에 여자가 되었다는 한국인들은 곰의 후손이라는 황당한 신화가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단군신화는 인류의 조상이 아메바였다는 진화론이나 그리스 신화에 버금가는 황당한 신화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욥기는 신화가 아니고 이스라엘에게 실제로 있었던 역사입니다. 욥기에는 여호와 하나님과 사단과 욥이 등장합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았던  당대의 의인이었습니다.

 

욥은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자식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리는 의인이었습니다.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습니다.

 

사단이 하나님께 욥을 고소합니다.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받은 사단이 욥의 재산과 자녀, 건강까지 모두 빼앗아 갑니다. 온몸에 헌데와 욕창이 나서 기와로 북북 긁고 있는데 심지어 부인까지 나타나서 여호와를 저주하고 칵 죽으라 저주하며 떠나갑니다.  친하던 친구들까지 나타나서는 아픈 곳을 콕콕 찌릅니다.

 

우리가 결말을 잘압니다. 세계가 주 안에 온 천하의 주인이신 전능자와 다툴 수 없음을 깨닫고 회개하는 욥에게 여호와께서는 이전보다 더 큰 부귀와 영화와 자녀의 복을 허락하십니다. 그는 그야말로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로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당대의 의인으로 불림을 받을만한 그러한 인물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lesson은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아니하시면 사단이라도 구원받은 성도를 시험 할 수 없다하는 영계(영의 세계)의 법칙입니다.

 

욥을 고소하는 사단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이라도 어찌하던지 고소할 꺼리를 찾으며 어찌하던지 실족하게 만들어서 결국이 저와 함께 어두운 지옥으로 함께 끌고 들어가고자 하는 사단이의 술책입니다. 기도원에서 돌아오던 비탈길

 

누가복음 10장 1절 이후에는 영적 싸움에 대한 예수님의 균형있는 설명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은 세 사람에 대해 말씀하신 후 따로 70명의 제자를 세워 각 마을로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 70명의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고 가서 영접하는 곳에 머물며 병자를 고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라고 명하십니다. 

 

만일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는 곳이 있으면 그 마을을 떠날 때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고 하시면서, 그날에 소돔이 그 마을 사람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17절에는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누가복음 10:20).

 

야고보서 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301호

 

어떤 사람은 모든 일 가운데 사단과 대적하는 것에 몰두한 나머지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즐거워하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비록 악이 우리를 공격할 수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그는 우리를 무찌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예수님께서 주신 보혈과 생명으로 인하여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3).

 

에베소서 6:13-18에 기록된 말씀에는 기독교 군사로서의 모습이 아름다운 그림으로 웅장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우리는 영적 전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 묘사된 군사는 그가 볼 수 없고 이해하지 못하는 적에 대해서 격렬하게 떠는 병사가 아닙니다. 그는 악의 그 어떤 공격에도 대항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보호와 무기를 가지고 자신있게 우뚝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성도들이 자신과 같이 무장하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귀신에게 이름을 물어 본 고립된 예를 (군대, 마가복음 5:9) 가지고 모든 병이나 질병 뒤에 있는 “귀신”을 제일 먼저 알고 그것을 그 사람으로부터 쫓아내야만 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악으로부터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악령의 이름을 찾거나 알아야 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신자들은 기독교인들이 질병과 고통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믿음은 귀신들이 비신자는 물론 신자들까지도 통제할 수 있다고 하는 더욱 그릇되고 이교도적인 결론에 그들이 도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성회는 이것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습니다. 사단이 틈타지 못하는 교회, 교회는 사단이 신자를 오직 억압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결코 신자를 소유하거나 통제할 수는 없다고 믿습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소유물이며 그의 나라의 자녀들입니다. 비록 귀신 능력이 예수님이 행하셨던 몇 번의 이적적인 치유하심과 구원하심에 관여되어 있었지만, 귀신이 포함되지 않은 자연적인 질병을 치유한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두려워하게 하는 영” (디모데후서 1:7)이나 “허약하게 하는 영” (누가복음 13:11)과 같은 성경 구절을 따라서 악령의 이름을 명명하거나 의인화하는 것을 권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결과입니다. 만일 두려워하게 하는 영이 있다면, 또한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게 하는 구별할 수 있는 영 (디모데후서 1:7)이 있어야만 합니다. 성경 학자들은 그러한 경우에 사용된 “영”이라는 단어를, 악한 것이든 선한 것이든, 항상 구별할 수 있는 개인의 영으로 다는 태도로 해석해 왔습니다.

 

영적인 전쟁을 부적절하게 극단적으로 취급하는 일부 사람들은 다니엘에게 말하는 천사에 관한 성경의 설명에 근거하여서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그들의 성공을 위해 싸우는 천사나 마귀를 가지고 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내가 어찌하여 네게 나아온 것을 네가 아느냐 이제 내가 돌아가서 바사군과 싸우려니와 내가 나간 후에는 헬라군이 이를 것이라. 오직 내가 먼저 진리의 글에 기록된 것으로 네게 보이리라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적하는 자는 너희 군 미가엘 뿐이니라” (다니엘 10:20, 21).

 

물론,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일꾼들을 보내시어 잃어버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메시지를 가지고 세상 모든 곳으로 가라고 하는 우리 주님의 지상 대명령 속에는 대륙이나 나라나 도시들을 다스리는 천사나 마귀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비록 사단이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이지만 (에베소서 2:2),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마귀의 계층 구조를 알고 이해해야만 한다고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핵심은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사단과 그가 어떻게 일하는가에 대해서 강조하는 대신에 우리들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신 우리 안에 계신 이에게 속해 있어야만 합니다 (요한일서 4:4). 영분별의 은사는 사단의 즉각적인 존재와 능력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꼭 필요할 때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관심사:

 

우리는 오만하고 주제넘게 사단의 능력에 개입하고 있음을 정기적으로 가르치고 실행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염려합니다. 확실히 우리들은 악마의 함정을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가 현혹시키며, 삼키기를 갈망하는 “포효하는 사자”처럼 찾아 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사단이나 하나님의 자녀들을 유혹하고 파괴하려는 사단의 노력을 두려워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만일 우리들이 마귀를 대적하면 그는 우리로부터 도망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야고보서 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우리들의 방패와 승리로서 믿음의 방패와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단의 맹렬한 화살에 중점을 두는 설교자는 본의 아니게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을 심어주기 보다는 두려움을 가지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사단은 실재하지만, 그러나 전지전능하시고 또한 인격적인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능력을 체험하는 것은 성령 충만한 모든 신자들이 가질 수 있는 특권입니다.

우리들은 비록 하나님과 사단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있는 실체이지만 우리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나 또는 사단에 의해 발생하지 않은 것들이 있음을 인식하고 가르칩니다. 부주의하여 순간적으로 생기는 사고는 마귀가 그러한 불행을 초래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을 하셨을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도 그러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 속에서 마귀의 영향에 대한 지나치게 근심하 것이 자신의 행동과 실패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 않는 태도, 무책임한 태도가 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하여 염려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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