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성령론_ 방언은 통역이 따르면 예언과 같다
성인성경학교 2024. 9. 29. 00:1813. 성령론_ 방언은 통역이 따르면 예언과 같다
고전 14장 13절에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
고전 14장 3절에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방언을 통역하면 예언과 같습니다.
방언을 하면 성경에는 통역하기를 간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방언을 직접 통역 안해도 그 나라 말로써 알아듣게 할 때도 있고 또 통역을 통해서 예언처럼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자매님이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고 난 다음 방언이 나오는데 언어 방언이 어찌나 유창나오는지 이거 정말 가짜 아닌가? 그래서 마음에 겁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늘 하나있는 동생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동생은 이태리의 로마에서 살고 있습니다. 동생이 구원받게 해달라고 늘 기도를 했는데 하루는 동생에게 무슨 일로 국제 전화를 예약(70-80년대) 해놓고 난 다음, 방언기도가 쭈~욱 나오는데 중지도 못하고 있는데 예약한 국제전화가 연결되어 그냥 방언으로 기도를 하고 난 다음 그 다음 방언이 뚝 그쳤어요. 그러니까 동생이 “누님! 뭐라구요? 뭐라구요?”
“얘야 미안하다. 그걸 방언이라고 하는데 나도 무슨말인지 모른다. 그냥 성령받고 난 다음 내 입에서 나오는데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데 너에게 전화하려고 하다가 갑자기 전화에 방언이 나왔다. 미안하다.” 그러니까 이해를 좀 해다오.
“아니 미안할 것 없어요. 누님이 분명한 이태리 말로써 나보고 뭐라고 말씀했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너희 죄를 용서하고 너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니 더 지체하지 말고 예수를 믿으라.’ 분명하게 이태리어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누님은 이태리어를 한글자도 모르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태리어를 이렇게 잘합니까?”
그래서
“얘야~ 내가 이태리어를 알수가 있느냐? 그걸 방언이라고 한다. 성령께서 나를 통하여서 방언으로 말한 것인데 나는 못 알아들어도 네가 알아들었으니 참으로 좋구나” 그일 후로 동생이 그 누님께 일어난 기적을 보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그런 간증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오순절날에도 제자들이 방언으로 말할 때 이방에서 온 사람들이 각각 자기 나라의 말로 알아들었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러나 방언은 직접 통역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 신학교 시절에 채플에 가서 저녁에 기도를 하는데 방언이 나옵니다. 방언을 하고 난 다음 동시에 통역이 나오는데, ‘네 앞에서 지금 엎드려서 기도하고 있는 저 여자는 예수믿는 여자가 아니라 삼각산에서 내려온 무당이다. 무당 귀신을 쫓아내라!’ 얼토당토 안하게 그런 통역이 입에서 나오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예배실에 불을 켜고 앞에 보니까 어떤 여자 한사람이 나와서 웃자 웃자고 손을 흔들고 있어요. 그래서 내가 나가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그쳐!’ 딱 그치면서 아주 뱀눈을 가지고 쳐다보더라는 겁니다. “네가 누구냐? 예수 이름으로 명한다!” 그러니까. “삼각산에서 내려온 귀신이다. 어쩔래?” 그러더랍니다. 조목사님도 생전 처음 그런 체험했다고 합니다. 그때. 방언을 하다가 방언통역이 나오면서 “저 앞에 앉은 여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전부 귀신이 들려서 하고 있는 것이므로 나를 욕하고 있다. 중지시켜라.” 그래서 내가 중지시켜서 그 여자를 쫓아 낸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조 목사님은 방언의 통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며 많은 유익을 준 체험을 하게 되었다도 합니다. 오늘날도 방언기도를 하고 필요할 때는 동시에 하나님이 방언통역을 주시는 것입니다.
7. 방언은 깊고 오랜 기도를 가능하게 한다
일곱째, 방언기도를 하는 것은 깊고 오랜 기도를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바울선생은 많이 기도하신 분입니다.
기도란 오래하면 오래할수록 신령해지고 오래하면 오래할수록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합니다. 여러분 바닷물도 찰랑거리는 해변가에 있는 것보다도 자꾸 깊이 걸어들어가면 나중에 깊은 물속에 헤엄을 치듯이 말입니다. 에스겔의 환상에서 보면 그가 강을 건너는데 제일 처음에는 발목에 채이고 그 다음에는 무릎에 채이고 그 다음에는 강물이 허리에 채이고 그 다음 헤엄치게 되었다 했습니다.
오늘날 성령이 충만한 것도 발목에 충만한 정도는 교회에서 끌려다닌 사람이고 무릎까지 충만한 사람은 꿇어 앉아 기도하는 사람이고 허리까지 충만한 사람은 이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 사람이고 헤엄치는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순종하는 성령 충만한 사람인 것입니다. 성령충만해지려면 오래 기도해야 합니다. 한 5분 10분 기도해서는 성령충만할 수 없습니다. 오래 기도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아는 말로만 오래 기도할 수가 있을까요?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아는 말로 기도하고 영으로 방언으로 기도하고 아는 말로 찬송하고 영으로 방언으로 찬송한다. 방언기도를 하면 내가 알아듣지 못하지만 오래오래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엡 6장 18절)”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여기에 성령안에서 기도하라는 것은 방언기도를 하라 그 말씀인 것입니다.
오히려 외부 목사님들은 기도를 몇시간씩 오래한다는 말씀을 많이 듣습니다. 몇 시간씩 이상씩 기도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뜹니다. 몇 시간 이상 무슨 할말이 그리 많은가? 내 자신을 위한 기도와 가족을 위한 기도, 교회를 위한 기도하고 나면 할말이 없는데 많이 했다고 시계 보면은 5분밖에 안지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30분이상 1시간, 몇시간을 기도하느냐. 그것은 방언으로 기도 안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아는말로 기도하다가 할말이 없으면 또 방언으로 기도하고 방언으로 한참 기도하면 또 은혜를 받아서 또 아는말로 기도하고 아는말로 기도하다가 또 지치면 또 방언으로 기도하고 밤새토록 오래도록 기도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기도한다고 합니다.
15여년전 쯤에 러시아 교회, 필리핀 교회, 우리교회 몇 교회가 모여 마이크 목사님 교회에서 년말 기도성회를 할 때입니다. 종일 기도하는 시간이지만 자유롭게 참석하여 기도를 하는데 저는 1시쯤에 도착하여 자리를 잡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마이크 목사님 교회 의자는 나무 의자이기에 앉아서 기도하는 게 불편합니다. 그래서 바닥에 주저앉아 기도하는데 조용한 찬양으로 시작하여 성령께서 편안한 마음을 주시면 방언기도를 시작합니다. 기억나게 하시는대로 제목을 가지고 방언기도를 합니다. 한시간이고 얼마간을 기도하면 내용이 다 끝나게되며 조용히 묵상 기도하다 찬양기도를 드리다 또 기억나게하여 주시면 또 방언기도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시간가는 줄도 모르게 기도하는데 마이크 목사님이 저녁 예배를 시작합니다 시간을 보니 6시가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5시간동안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기도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오래 기도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는말로 기도하고 방언으로 기도하고 찬양하고 아는말로 기도하고 방언으로 기도하고 하니까 장 시간 기도하면서도 시간 가는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기도가 기도의 언어로써 굉장히 좋은 것이라는 것을 그 때 알게됩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의 신앙생활 30년을 돌이켜 볼 때 내가 만일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고 예수님이 없는 신앙생활이었다면 그것이 가능하였을까? 지금부터 예수를 떠나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 상상이 안갑니다. 그와같이 신앙생활에서 방언기도없이 신앙생활한다 전혀 상상이 안갑니다. 저에게는 예수 = 방언기도 입니다.
지치고 피곤하고 무력함을 느낄 때 예배에 참석하며 방언으로 계속 기도하면 마음이 상쾌해지고 변화받고 깊은 은혜속에 들어갈 수 있게 됨을 느끼게 됩니다. 방언기도를 하면 이미 받은 은혜와 성령충만이 회복되며 주님과 교통하게 됩니다.
오랜 시간 집중하여 성령안에서 기도를 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랜 기도, 방언 기도를 하지 않고 하나님이 계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성령으로 세례받고 방언으로 기도를 하지만 각각의 은혜와 은사의 분량이 모두 다릅니다. 우리 목사님의 가정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강력하여서 직접 음성으로 들려주시는 일이 빈번한 줄을 우리가 압니다. 우리 교회는 성령세례 받은 성도가 85%가 넘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예언과 중보의 역사에 뛰어납니다. 저는 기도를 할 때 없던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것을 풀어서 정리를 해 주십니다. 특정 말씀이나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문이 있을 때에 예배 중에 또는 기도 중에 알게하여 주십니다.
영적인 것은 순간적으로 깨달아지게 됩니다. 마치 없던 것이 있는 것으로 창조되듯이 갑자기 알게되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예배에서 찬영 형제가 전한 말씀을 듣고 저는 이런 표현을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영감있는 노래를 들을 때에 닭살이 돋는다는 표현을 듣게 되는데, 나는 오늘 설교말씀을 듣고는 찌릿하는 감정을 느꼈습니다하는 표현을 했습니다.
설교 내용에 이러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말씀으로 주님과 대화할 때에 주께서 왜 너는 너의 입장에서 늘 이야기를 하느냐?, 내가 네 입술에 말씀을 붙혀주었는데 전도할 때에 너는 왜 너의 연약함을 앞 세우며 주저하는냐? 그렇게 책망하신다고 합니다. 그 내용이 주님과의 직접적인 대화 내용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만 저는 그렇게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평소에 말씀과 대화하는 습관이 되어 말씀을 말씀으로 풀어내며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성령의 깨달음으로 성령의 알게하시는 은총안에서 마치 말씀에 홀린듯이 중얼거리며 말씀과 동행하는 습관에서 나오는 그런 깨달음일거라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Sunday School 어린 생명들에게 추구하고자 하는 하부루타 교육의 방법으로 보이는 작은 열매의 시작일 것이라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잠시 말씀에서 벗어 났습니다. 다시 “방언은 통역이 따르면 예언과 같다”는 중심 메세지로 돌아갑니다.
(고전14: 3)“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고전 14: 13절)“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
오늘의 본문의 장 고전14 장은 공중 예배에서 나타나는 방언과 예언에 관한 지침으로, 교회에 아직 교리에 관한 가르침이 확립되지 않았던 초대교회의 상황에서 은사가 넘치던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발생합니다. 교회의 분쟁과 분열 조짐에 관한 고린도 교회의 질문에 사도바울이 답변(참조 1:10-6:20, 1:11)하는 서신 내용이 고린회중에게 도 전후서 전체 내용입니다. "공중예배에서의 방언과 예언의 은사 사용"에 관한 지침 내용이 고전 14장 입니다.
그 중에서 3절, 13절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3절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공중 예배에서의 회중과 교회를 향한 방언이 즉 대인 방언 입니다. 대인 방언으로 말하는 방언 내용을 성령이 통변하게 하시며 예언하심으로 교회에 덕을 세우며 성도들을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입니다.
13절: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부흥회의 공중예배에서 강사 목사님이나 인도하는 목사님이 은사가 있어서 회중이나 개인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고자 하더라도 방언으로만 축복의 말을 하면 회중이나 개인이 어찌 그 의미를 알아듣겠는가 그러므로 회중을 향한 계시는 반드시 통변(통역)의 은사자가 통역을 해야할 것이며 개인 안수 할 때는 수혜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자국언어로 축복을 하라 권면하는 내용으로,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를 받고 대신방언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들은 예언과 통변(통역)의 은사를 받기를 사모할지니. 제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피츠버그 한인교회로 1992년 2째주부터 참석하게 됩니다. 같은 해인 1992년 아직 밖에서 집회를 하기에는 조금 이른 6월 초에 twinlake에서 있었던 가족수양회에서 윤영일 집사가 땅 바닥에 무릅 꿇고 하늘을 향해 손을 높이 들고 성령세례를 받게됩니다.
같은 해의 긴 여름이 지나고 가을부터 윤영일 집사도 제자훈련반에서 훈련을 받게 됩니다. 제자훈련의 시작이 지난주 목사님의 설교 내용을 5분 - 15내로 정리하여 순서대로 앞으로 나가 매주 발표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목사님이 성경의 진주와 같은 그야말로 귀한 말씀들을 쏙 뽑아내어 제자반에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이 얼마나 진귀하고 보배로웠던지요. 제자훈련반에서는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는 성도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성령세례를 먼저 받고 제자반에 들어갔으니 말씀이 얼마나 고귀하던지요^^
1993년 초 제자반에서 고전14장 말씀을 상세하게 집중적으로 연구하며 교육을 받게됩니다. 아래의 고전14장은 그 때의 기억을 더듬어 정리해 가는 내용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공중 예배의 방언과 예언의 지침.
성경구조 및 핵심요약
1. 예언을 하려고 하라(1절-5절)
2. 예언과 통변의 지침(6절-10절)
3. 풍성하기를 구하라(11절-15절)
4. 공중 예배의 안수와 지침(16절-20절)
5. 방언과 예언의 목적(21절-25절)
6. 예언과 통변의 지침(26절-30절)
7. 성령의 권세에 순복하라(31절-35절)
8. 명령대로 질서있게 하라(36절-40절)
1993년 가을 입니다. 당시 Monroeville Assembly of God에서 큰 집회가 있으니 필히 참석하라는 목사님의 당부에 기대하는 마음으로 우리 제자반원들은 일지감치 앞자리 왼쪽에 자리잡고 집회에 참석하게 됩니다.
실제 상황 입니다.
고전 14장 공중방언의 실제의 예
1993년 미 하나님의 성회 Penn-Del District의 Annual Meeting 마지막 예배 시간이다. District의 superindendant의 불과 같은 권면의 설교 말씀이 끝난 후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서서 찬양을 인도하며 모든 예배가 거의 막바지에 도달 했을 때이다.
얼마 동안 간절한 기도와 찬양이 어우러지며 예배 중에 운행하시는 성령의 충만하심이 온 회중 위에 역사하심을 느낄 때에 잠시 고요함이 흐르는 듯 하더니, 갑자기 회중 안에서 낭낭한 소리로 방언소리가 터져 나온다. 갑자기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놀라서 눈을 번쩍 뜨고 회중을 둘러 본다. 그 순간! 통변(예언) 그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감지하고 바로 눈을 다시 감는다. 그런데 그 낭낭하게 들리는 방언소리가 귀에 많이 익다. 바로 2주전 우리교회 부흥회에서 안수기도가 끝난 후, 모든 순서가 끝나가는 중에도 한 자매가 무릎으로 서서 간절히 기도한다. 그 모습을 본 강사목사가 다가가서 손을 머리에 얹는 동시에 “따따부따, 따따부따” 하며 언어 방언이 터진다. 강사목사님 왈 “방언은 혼자 다 받네” 당시에 언어 방언을 모르던 나에게는 기이하게 보일 수 밖에 없었다. 바로 그 방언이 미 하나님의 성회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진행되는 상황에 놀라 가볍게 감전된듯한 상태로 귀는 쫑긋, 온통 진행되는 상황에 집중 한다.
오순절 초대교회 시대에 고린도 교회에서 실제로 예배에서 있었고 사도 바울이 고전14장에 기술한 그 상황이 현재 미국교회 실제 상황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는 모든 교인에게 성령의 은사가 넘쳐나 모두가 방언하고 예언하고 선지자 노릇 하며 사역의 분담이 명확히 구분이 안 되었으며 예배에서 무질서 한 상황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남으로 인하여 신자들이 제기한 질문을 당시 에베소교회에 있던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공중예배 부분에 대한 답변이며 Instruction이 고전14장이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변할 것이요. 만일 통변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예배 인도자는 공중예배 중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여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며 통제해야 한다. 예언(방언)하는 자를 둘 많아야 셋으로 통제와 제한을 받으며 통변은 회중 안에서 한 사람이 하며, 다른 사람은 분별하라. 분별하는 사람은 당연히 예배인도자이다. 오순절 장자 교단 하나님의 성회에서는 예언하는 자가 회중 안에서 통변 할 수 있는 자가 있다는 확신이 없으면 아예 예언을 하지 말라. 공중예배에서의 Instruction이 문서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 처음 당하는, 공중예배 중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에 모든 감각이 동원되어 집중한다.
잔뜩 긴장하여 집중하고 있는데 영어로 말하는 통변이 회중 안에서 낭낭하게 울려 퍼진다. 통변의 내용은 “ 담대하게 나가 전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말씀” 그대로이다. 당시 현장에서의 예언과 통변 내용을 번역하거나 성경을 인용하여 영어로 기록할 수도 있겠으나 본인이 한국인으로서 완벽한 한국어로 이해 하였기에 한국어로 전달하는 것뿐이다.
“담대하게 나가 전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통변이 나오자 회중의 여기저기서 여성 성도들의 울음이 터져 나온다. 참다가 째지며 터져 나오는듯한 소리로 “Jesus Christ” “Jesus Christ” 하면서 흐느낀다. 우리 한국 회중들 같으면 “주여” “아버지”하고 울부짖을 것 같은데 그들은 “Jesus Christ” full name을 부르며 흐느낀다.
회중에서 나온 예언과 통변을 인도하시는 목사님이 재차 설명하며 감사 기도와 찬양으로 예배를 closing한다. Praising Pastor가 단에 오르더니 찬양으로 회중을 인도한다. 대다수의 회중들은 움직이지 않고 남아있어 찬양으로, 기도로, 교회에 권면의 말씀을 주신 성령님을 찬양한다. 이 교회는 해외선교 특히 멕시코 선교에 집중하는 교회로“담대하게 나가 전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더욱 선교에 힘쓰는 교회임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공중예배에서 나타나는 예언과 통변의 역사가 현재 오순절 교단, 미 하나님의 성회 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100주년을 넘긴 한국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성회 한국총회를 비롯한 어느 교단에서도 예배 중에 공중방언이나 예언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 글을 기록하는 목적은 이러한 공중예배 중에 나타나는 예언과 통변의 역사가 기독교 2000년의 역사가 흐른 현재21세기에서도 여전히 유용하게 나타남을 세상에 알리려 함이다.
성령님이시여! 한국 교회에서도 공중방언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옵소서!
[결론]
방언은 놀라운 기도의 언어입니다.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 방언을 많이 말함을 감사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8절에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바울선생은 고린도 교인들이 다 합쳐서 하는 방언보다 더 많이 방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들어있으면서도 방언을 하고 여행하면서도 방언을 하고 그리고 천막을 만들면서도 방언을 했습니다.
우리 아는 기도는 아는 말에 집중해야 되기 때문에 한꺼번에 두가지 일을 할수 없지만 방언기도는 내 마음이 하지 않고 내 영이 성령을 통해서 하기 때문에 설거지 하면서도 방언하고 걸어가면서도 방언하고 일하면서도 방언하고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방언은 자동기계입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숨을 쉬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심장이 뛰는 것처럼 내가 모르는 사이에 방언으로 늘 기도하게 됩니다. 저는 밤에 자다가 깨어나면 혼자 방언을 하고 있는 것을 종종 발견합니다. 잘 때 아무것도 모르는데 혼자서 성령이 폭풍우처럼 불어와서 방언으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가 신령하고 긴 기도를 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되는지 말로다 할 수 없습니다.
기도의 언어입니다.
아는 말로 기도하고 방언으로 기도하는 기도의 언어인 것입니다.
우리 한 구역장님은 성령세례받고 방언말하고 싶어서
“하나님 나에게 성령세례 주시고 방언을 달라고 굉장히 기도를 많이 했는데 어느날 아침에 아침식탁을 차리는데 남편도 와있고 애들도 와있는데 식탁을 차리자 그 자리에서 뛰고 구르고 방언을 하고 밥도 못먹고 밥상이 다 날라가 버리고 남편과 애들이 눈이 휘둥그레지고 왜 이러냐고 엄마를 붙잡고 그런데 그만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언제 성령을 충만히 받을지 모릅니다.
제가 오키나와에서 집회를 하는데 오키나와 군인 한 사람이 이런 간증을 합니다.
이 미군이 자기도 성령받고 방언을 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아무 효과가 없어서 주일날 기도도 하고 잠자리에서 기도도하고 그리고 몇 달이고 계속 기도를 했는데
하루는 자전거를 타고 노는 시간에 길거리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성령이 임해서 자전거를 타면서 방언을 하고 그냥 야단법석했다고 합니다. 성령께서 언제 임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면 언제 올지 모르게 성령이 임하시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고 또 성령이 방언기도를 주시면 방언기도가 우리의 신앙생활에 굉장한 유익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방언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것 왜 하느냐? 왜 하는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충분히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주시기 때문에 주님이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할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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