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

다락방 2024. 7. 29. 21:43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                                                                          조용목, 최완기 지음

1부 성령은 누구신가?

 

1장       성령 하나님

성령은 누구신가? 라는 질문은 성령론을 시작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 대답해야하는 물음이다. 왜냐하면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없이 성령에 대해 논한다는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1.    초대교회부터 은사주의까지: 역사는 성령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이해했는가

사실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초대교회 시대부터 현대까지 계속 추구되어 왔다. 바꾸어 말하면, 이는 수세기 동안 교회와 성도들이 성령을 바로 이해하지 못햇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비인격적인 하나의 물질이나 힘으로 이해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신격을 부인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극단적인 열광 상태로 인식했다.

사도행전 8장의 기록을 보면 마술사 시몬은 성령을 마치 돈을 주고 살수 있는 물질이나 힘처럼 이해했다(8:10) 고린도교회에는 성령의 은사들이 풍성하게 나타났는데, 교인들은 그것을 무절제하고 무질서하게 사용했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그들이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하도록 지도했다.

 

AD 156년경 몬타누스(Montanus)는 젊은 두여자 예언자 프리스카 (Prisca), 막시밀라(Maxmilla)와 함께 예언 활동을 했다. 그들은 복음의 종말론적, 천년왕국적, 예언적 요소를 강조했다. 또한 그들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에 엄격한 금욕 생활을 통해 종말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몬타누스는 보혜사 성령이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예언자가 곧 보혜사라고 주장해 결국 이단으로 정죄 되었다. 또한 동방교회에서는 마케도니우스(Macedonius)와 성령훼손당 이라는 이단이 일어나 성령이 하나님으로부터 피조된 능력 혹은 도구라고 주장했다.

 

고대 교회 당시에는 이런 열광주의에 대한 반작용과 이단들에 대처해 교리를 정립해야 하는 시급한 문제 때문에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가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단들에 대처해 신론과 기독론은 바로 정립되었지만 성령론의 정립은 무시되었다. 그러다 보니 성령에 대한 이해가 각양각색으로 나타 나게 되었다.

물론 니케아 공의회(AD 325)에서 삼위일체가 거론되었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우스파에 대응해 아버지와 아들을 동일본질로 보는 니케아 신조가 채택되었지만, 이때 성령의 신성에 대한 부분은 포함되지 않았다.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러다가 AD 380년경 아리우스파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은 피조물이고, 비록 신성을 가졌다 하더라도 성부와 성자에는 못 미치는 신성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응해 그레고리(Gregory)는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en)와 바질(basil)과 함께 제2콘스탄티노플 교리서를 만들어 성령도 성부와 성자와 동등한 삼위일체의 제3위격, 곧 하나님 자신이심을 공표했다.

 

성령은 주인이 되시며 생명을 주시는 자이시며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위치에 있으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를 받고 찬양을 받으시는 자이시며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자이시니, 하나의 거룩한 공회와 사도적인 교회안에서 한 세례를 통하여 죄 사함을 얻고 세상의 마지막 날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생명의 부활을 소망합니다. 아멘.

 

콘스탄티노플 교리서중에서

 

비록 오랜 시간에 걸쳐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어렵게 삼위일체적 성령론이 정립되었지만, 이는 아주 중요한 결정이었다. 즉 하나님은 한분이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세위격으로 계시다는 것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본질이고 신성과 전능하심과 영원성에 있어서 동일하시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그러나 윌리암 멘지스(William Menzies)는 종교개혁 시대까지 성령론은 성령이 오직 삼위일체의 제3위격 정도로만 이해되고 발전되었다고 말했다. 폴 포머빌(Paul A. Pomersville)은 이런 현상을 ‘성령론 중단’ 또는 ‘성령의 침묵’ 이라고 불렀다.

해리 보어(Harry Boer) 또한 왜 교회가 여러 세기동안 그토록 복음 전파의 원동력으로서의 성령에 대해 무관심 했는가? 하는 질문을 다뤘다. 그는 그 이유를 크게 두가지로 말했다. 첫째는 구속에 있어서 성령의 숨은 역할 때문이고, 둘째는 성부와 성자라는 이름과 비교해 성령은 자신을 강조하지 않고 뒤에 숨기를 원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멘지스가 지적한 것처럼, 오랫동안 간과되었던 성령론이 18세기와 19세기의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의 성경신학과 케직신학(Keswick Theology)으로 인해 서서히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 오순절주의의 탄생으로 성령론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 되었다.

버나드 브랫슨(Bernard Bresson)Studies in Ectasy(엑스터시에 관한 연구)에서 2세기 말의 몬타누스주의부터 19세기 말의 카톨릭 사도주의까지 나타난 은사주의자들을 총 24개 종파로 구분했다. 이 종파들은 각각의 다양성과 동시에 공통적인 면들도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 공통점은 크게 네가지였다. 첫째, 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했고, 둘째, 사도 시대의 교회를 모든 시대 교회의 표준으로 생각했으며, 셋째, 기성 교회의 타락으로 인한 반동으로 일어난 모임들이었고, 넷째 자신들이 성령의 직접적인 계시를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 등이다이 같은 은사주의는 거의 2천 년 동안 이어져 왔다. 브렛슨은 현대 교회가 성령론에 관심을 같는데 은사주의가 음성적, 양성적으로 공헌했다고 말했다. 그러면 성령은 누구신가? 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2.    성령의 신격: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성령은 삼위일체의 제3위격으로 성부, 성자와 동일하시다. 즉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물론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많은 구절들이 있다.

 

 예수님은 부활후 제자들에게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8:19)라고 명령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들이라고 복수가 아니라, ‘이름이라는 단수를 사용하셨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심을 의미하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도 후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라고 말함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특수한 연합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순서로 호칭한 것은 서열, 우열, 순위를 정한 것이 아니고 단순히 관계를 뜻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1)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속성

 

하나님의 속성이 성령에게도 있음을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a)   전지하심

성령은 모든 것을 아신다. 예수님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14:26)고 말씀하셨다. 바울도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12:10-11)고 말했다.

 

b)   전능하심

성령은 전능하시다. 이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잉태케 하신 일에서 잘 나타난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1:35).

또한 온 우주가 성령에 의해 창조된 것이 성령의 전능하심을 나타낸다. 성경에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느니라”(창1:2) “그 신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26:13)라고 기록되어 있다.

 

c. 무소부재하심

성령은 무소부재 혹은 편재하신다. 다윗은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139:7)라고 고백했다.

 

d. 영원하심

성령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분이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4)라고 말했다.

 

e. 진리이심

성령은 진리이시다. 성경은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5:7)라고 말한다. 그리고 또 주의 선한 신을 주사 저희를 가르치시며”(9:20)라고 증언하고 있다이처럼 전지하심, 전능하심, 무소부재하심, 영원하심, 진리이심 등은 모두 하나님의 속성이다. 성령에게 이런 속성들이 있다.

 

2)   성령이 하시는 일

성령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하신다. 그 다섯가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a)   창조하심

성령은 창조의 영이시다. 성경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느니라”(1:2)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33:4), “주께서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104:29-30)라고 말하며, 성령이 창조에 참여하셨음을 보여 준다.

 

b. 구원하심

성령은 구원의 영이시다. 인류 구원에 관한 성령의 일하심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6:11)

 

c. 생명을 주심

성령은 생명을 주신다. 생명을 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따라서 생명을 주시는 것 자체가 성령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해 준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3:5-6)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여 생명이라”(6:63)

 

d. 성경을 기록하게 하심

   성령은 성경의 원 저자시다. 성경에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밷후1:21)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감동이라는 말은 혹은 호흡의 뜻을 가지고 있다. 즉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숨성령의 숨으로 만들어졌음을 뜻한다. 이는 성령의 이중적 저작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원저자이신 성령이 성경 기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성경을 기록할 때 오류가 없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e. 부활케 하심

   성령은 부활의 영이시다. 성경에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8:11)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이를 부인하는 사람은 이단이다.

 

1.    성령의 인격: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가지신 분

 

성령의 일하심 가운데 혹은 권능이 현저하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성령이 비인격적인 이나 ’() 같은 것은 아니다. 성령을 인격으로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지성과 감정과 의지는 인격의 구성 요소이다. 성령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계신다.

 

1)   지성

사도행전 ‘52장에서 성령은 전지한 지성을 가지신 하나님으로 소개되고 있다. 배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게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딸값 얼마를 감추었느냐”(5:3)고 책망한 후 곧바로 사람에게 거짖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5:4)고 말해 성령이 하나님이시며, 그분으 ㄹ속일 수 없다고 말했다.

바울도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1)고 말했다.

      또는 그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 뜻대로 성도를 위해 중보기도 하신다고 말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8:27)

 

2)   감정

성경 여러 곳에 성령이 감정을 가지신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바울은 성령의 사랑”(15:30)을 언급했고.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4:30)고 말했다.그리고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8:26)고 말했다. ‘사랑’, ‘근심’, ‘탄식등은 모두 감정과 관련된 표현이다. 따라서 성경은 성령이 감정을 가지신다는 것을 확증한다.

 

3)   의지

바울은 성령이 그분의 듯(의지)대로 은사들을 나누어 주신다고 말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12:11)

 

또한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이 아시아로 가서 선교하려고 할 때 성령이 수차례 이를 막으시고 마게도냐로 가도록 인도 하셧다. 성령이 강력한 의지로 바울을 하나님의 섭리대로 인도하신 것이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예수의 영이 허락허락지 아니하시느니라”(16:6-7).

 

이 외에도 성경에는 성령이 지성, 감정, 의지를 갖고 행하신 일들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 인격체로서의 활동들에는 기르치심(14:26), 증거하심(15:26), 명령하심(8:29), 보내심(13:4), 부르심(22:17), 위로하심(16:7), 행하심(고전12:11), 간구하심(8:26) 둥이 있다.

 

2.    성령의 상징: 성경에 나타나는 일곱가지 상징

성경에는 성령을 형용하는상징이 대략 일곱 가지가 있다.

 

1)   바람.

을 의미하는 희브리어 단어는 루아흐’(   )이고 헬라어는 퓨뉴마’(   )이다. 두 단어는 모두 바람혹은 호흡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바람은 성령을 탁월하게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3:8)고 말씀하셨다. 성령은 마치 바람처럼 눈으로 볼 수 없다. 하지만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변화는 볼 수 있다.

 

2)  

은 성령의 상징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불로 제자들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3:11) 예수님도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12:49)라고 말씀 하셨다. 성령의 불은 우리의 죄를 태우고 열심을 주며, 은사들을 마치 불일듯하게 한다(딤후1:6)

특히 바람과 불은 오순절 날 성령 강림 때 나타난 현상들이다. 제자들은 바람 같은 소리를 들었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2:2-3)

 

3)  

도 성령의 보편적인 상징 중 하나이다.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 하시더라)”(7:37-39)

 

물은 육신의 목마름을 해소시키지만 사람의 심령의 갈망은 해결하지 못한다. 심령의 갈망은 성령이 해소 시켜 주신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자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3)고 하셧다.

 

4)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1:13)라고 했다.

      인은 도장을 의미한다. 계약서와 토지 문서에 도장을 찍어 소유권을 확증하듯이,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난 후 인 치심을 받는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목자들이 자기 양들을 구분하기 위해 자신만의 도장을 불로 지져 찍었다. 이처럼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인을 쳐서 그리스도의 소유인 것을 확증하신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심을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앗느니라”(4:30)

 

5)   기름

기름또한 성령의 보편적인 상징이다. 구약에서 성령의 임하심은 종종 기름 부음으로 이해 되었다. , 제사장, 선지자는 먼저 기름 부음을 받고 나서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잇었다. 이는 하나님이 그 직을 승인하셧다는 증표이기도 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기름 부으심을 받았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4:1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도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니라”(10:38)

성도들은 모든 것을 가르쳐서 알게 하시는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하게 된다(고후1:21,요일2:20, 27)

 

6)  

에베소서 6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전십갑주에 대해 말한다. 이는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 성도들이 무장해야 하는 무기를 말한다. 허리띠, 흉배, , 방패 들의 무기들은 다 방어용이다. 그러나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은 유일한 공격용 무기이다(6:17).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성령이 말씀하신다고 증언하고 있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딤전4:1),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3:7),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9:8),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5:7)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요한 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한 교회도 빼놓지 않고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2:7, 11, 17, 29, 3:6, 13, 22)라고 말씀 하셨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사단에게 시험을 당할 때 말씀으로 대적해 승리하셨다.(4:1-11).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4:12)라고 말했다.

 

7)   비둘기

예수님이 세례요한으로부터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들기같이 그 위에 임하셨다(3:16). ‘비둘기는 예예로부터 평화의 상징이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 위에 임하신 것은 성령이 온유하고 순전한 품성을 나타낸다.

 

 

5.    다른 보혜사 성령: 곁에서 보호해 주시는 분

예수님은 성령을 다른 보혜사라고 부르셨다. 이 용어는 성경에서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만 기록되어 있다.

보혜사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parakleotos)인데, ~의 곁에라는 뜻을 가진 파라’(para)부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클레오’(kleo)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 말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부름을 받아 곁에 계시는 분이라는 뜻이고, 의역하면 곁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다.

파라클레토스는 아주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 영어 성경들을 보면 위로자’(comforter), ‘상담자’(counselor), ‘변호자’(advocate), ‘돕는 자’(helper)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파라클레토스라고 불렀다. 개역한글 성경은 이 단어를 대언자라고 번역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여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러”(요일2:1)

 

로마서 82절에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 할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보혜사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인간을 대신해 하나님을 향해 탄원하고 간구하는 대언자이시다.

이처럼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대표해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중재하고 변호하는 직분을 감당하신다.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대신 담당하고 변호하셔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힘입어 담대하게 하나님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보혜사는 무엇인가? 요한복음 14 16절에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보혜사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다른이라고 번역되는 용어가 헬라어에는 두가지가 있다. ‘헤테로스’(heteros)알로스(allos)이다. 전자는 이질적 다름을 후자는 동질적 다름을 뜻한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다른 보혜사는 알로스 파라클레토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성령은 모두 같은 성질을 가진 보혜사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15:26)라고 말씀 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16:7)라고 약속하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하셨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보혜사인 예수님이 떠나시고 다른 보혜사 성령이 오시는 것이 성도들에게 유익한가?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와 계실 동안에는 시공의 제한을 받으셨다. 그래서 공생애 기간에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리치셨다. 그러나 다른 보혜사 성령은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고 성도들을 위하여 일 하실 수 있다.

둘째, 예수님은 정해진 공생애 기간에 한정된 지역의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하셨다. 예수님은 구속의 임무를 완수하고 승천하셨다. 그러나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셧다.성령은 성도들 안에 임하셔서 모두가 복음의 증인이 되어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게 하신다.

셋째, 예수님은 부홀 후 승천하시기 직전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고 하셨다. 예수님은 승천하셨으나 다른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게 하신다.

이러한 이유들을 생각할 때 예수님이 떠나시고 다른 보혜사 성령이 오시는 것이 이 땅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유익한 것이다.

 

2구약의 성령

 

성경에서 성령의 일하심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그러나 크게 구분하면 외적 일하심’(outer work)내적 일하심’(inner work)으로 나뉜다. 구약에서 성령의 일하심을 모두 전지와 관련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구약에서 성령은 신약에서처럼 사람에게 내주해서 일하시지 않았다는 말이다.

구약에서 성령의 일하심을 주제별로 구분하면,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눌 수 잇다. 신학, 특별히 주경신학에서는 주제별 연구를 모티브’(motif) 혹은 띠임’(theme)으로 부른다. 그러면 구약에서 성령의 여섯가지 일하심을 모티브 호은 띠임으로 구분해 살펴보자.

 

1.    창보 모티브:Creation Motif

 

을 뜻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구약에서는 인격이 없는 이나 바람의 의미로, 때로는 사람의 마음혹은 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하나님의 혹은 성령의 의미로도 쓰였다. 창세기 12절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느니라고 하면서 루아흐를 사용한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 단어가 성령보다는 어떤 힘이라고 생각해 바람이라 번역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의 내적 증거를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성령도 동역하셧던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에는 천지창조가 성령의 일하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증거들이 곳곳에 있다.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33:6)

그 신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26:13)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104:30)

 

이를 통하여 천지를 창조하는 일에 성령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과 함께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성령은 인간을 창조하는 일에도 관여하셨다. 창세기 2:7절을 보면 하나님이... 생기(생명의 기운)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라고 했다. 욥기334절도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고 했다.

 

이처럼 생기는 하나님이 나무나 돌이나 철로 만든 다른 우상 신들에 비해 살아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생기를 부어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생명을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이를 존속시키시는 행위의 한 표현이다. 생기를 주거나 거두어 가시는 것은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큰 능력의 또 다른 표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무에서 유를 창보하시는창조의 영이다.

 

성령은 창조의 영일뿐만 아니라 이미 창조된 피조물들을 갱신 시키시는 영이기도 하다. 타락한 인간의 죄 된 본성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은 인간과 영구적으로 함께 계실 수 없게 되었다(6:3). 하나님은 인간이 육신으로 이 땅에 있을 동안만큼은 그 분의 신을 선물로 주셨다.(42:5), 그러나 인라고 탄식했다.간은 하나님을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케 했다(63:10).

이런 인간의 타락한 심령은 성령의 갱신을 필요로 했다. 이를 누구보다 깊이 깨달았던 다윗은 내가 주를 떠나 어디로 가리이까”(139:7)라고 탄식했고,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51:10)라고 기도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타락하고 완악한 인간의 미음에 그분의 새 신’(new spirit)을 주셔서 갱신 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갱신의 약속은 에스겔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11:19-20)

또 새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율례를 지켜 행할지라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30:26-28)

 

흥미 있는 점은 이런 성령의 갱신이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의 갱신은 다른 피조물인 자연에게도 적용된다. 인간의 범죄는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계도 타락시켰기 때문이다.

요즘 사회의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친환경제창들, 곧 자연계와 생태계의 오염이나 파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한 예가 된다. 바울은 후에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자유에 이르는 것”(8:21)을 탄식과 고통으로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분의 성령을 위로부터 부어 주시면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고 , 그 때에 하나님의 공평과 의가 새로 갱신된 피조물 위에 있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32:15-18), 성령으로 갱신된 자연계는 역시 갱신된 인간에게 또 다른 활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44:1-5)

 

2.    전수 모티브: Transfer Motif

 

구약에 나타난 성령의 일하심 가운데 괄목할 만한 것들 중 하나는 바로 지도력의 전수와 관련된 것이다. 성령은 한 사람의 지도력을 다른 사람()에게로 전수 혹은 이양 할 때 그() 위에 임해 일하셨다.

민수기 11장에는 이스라엘이 백성이 만나 때문에 불평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수고하지도 농사를 짓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하루 세끼를 굻지 않고 먹는 것 자체가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고기를 못 먹는다는 는 이유로 크게 불평했다. 모세가 하나님께 이 일을 고하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노인들 중에서 장로 70인을 회막 앞 여호와  앞에 세우라고 하셨다. 그리고 모세에게 이런 약속을 하였다.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내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지지 아니하리라”(11:17)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회막 앞 여호와 앞에 70인의 장로들을 세웠더니, 하나님의 신이 그들 위에 임하셨다.(11:25). 또한 모세가 나이가 많아 하나님께로 갈 때가 가까이 오자 그는 여호수아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그런데 모세가 죽기 전 여호수아를 데려다가 안수 할 때 지혜의 신이 그 위에 충만하게 임하셨다.(34:9)

똑 같은 사건을 민수기 27장에서는 좀 다른 표현을 사용해 기록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여호수아를 데려다가 안수하라고 명령하셨을 때 여호수아를 가리켜 신이 감동된 자라고 하셨다.(27:18)

엘리야의 승천 사건에서도 같은 예를 볼 수 있다. 열하2장은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영감의 갑절을 전수해 주고 나서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에게 그가 떠나기 전 그의 영감을 갑절을 달라고 간구했다.(왕하2:9).

그런데 15절을 보면, 엘리사의 생도들이 엘리사 위에 엘리야의 성령의 능력이 임한 것을 보고 그를 영접하고 그 앞에 엎드렸다고 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심ㄴ의 지도력을 전수하거나 혹은 이야할 대 성령이 그 지도력을 전수 혹은 이양 받는 사람()위에 임해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을 볼 수 있다.

 

1.    예언 모티브: Prophecy Motif

 

구약에 나타난 성령의 일하심 중 또 하나의 특징은 성령과 예언의 특별한 관계이다..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예언하도록 하실 때 성령을 그 위에 임하게 하셨다.

민수기11장에는 모세가 70인의 장로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이 그들 위에 임하였셧고, 그들이 예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1:25).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70인의 장로들 중 일닷과 메닷 두 사람은 모세가 불렀으나 회막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신이 두 사람 위에 임하셔서 그들도 진중에서 예언을 했다(11:27-28). 아마도 여호수아는 두 사람의 예언 때문에 모세의 권위가 조금이라도 손상을 입을까 염려했던 것 같다. 그러나 모세의 대답은 여호수아의 생각과 달랏다.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1:29)

여기서 우리는 성령과 예언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임의로 예언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엘닷과 메닷처럼 다 예언하는 선지자가 되기를 원하는 모세의 소망은 비록 구약에서는 성취되지 않았지만, 후에 요엘의 예언에 따라(2:28-29)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에 비로소 성취되었다.

민수기 22’23장에서는 선지자 발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거짖 선지자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돈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하는 발락의 각본에 따라 움직였지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스라엘을 도리어 축복하게 하셨다. 그때 하나님의 신이 발람 위에 임하셨다 (23:4). 이스라엘을 저주할 거짖 선지자의 입을 막으시고, 대신 이스라엘을 축복하도록 성령이 그 위에 임해 일하신 것이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변방 나라들이 왕을 가진 것을 보고 부려워하여 하나님께 자기들에게도 인간 왕을 달라고 구했다.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지 않으셨지만, 마지못해 허락하셨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왕이 바로 사울이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은 후 그에게 곧 나타날 세가지 징조들에 대해 밀했다. 첯째는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날 것이고, 그들이 사울에게네가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을 찾은지라”(삼상10:2)라고 말할 것이라는 징조였다, 둘째는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하나님을 뵈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사람을 만날 것인데, 그들이 사울에게 문안하고 떡 두 덩이를 줄 것이라는 징조였다(삼상10:3-4), 마지막 징조는 사울이 하나님의 산에 이르면 선지자의 무리가 예언을 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나게 될 터인데, 그 때 사울에게도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여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리라는 것이었다(삼상10:5-6).

이 세가지 징조들은 다 성취되었다(삼상10:9). 특별히 사울이 산에 이를 때 하나님의 신이 크게 임했고, 그가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을 했다고 성경은 말했다(삼상10:10)

이러한 확실한 징조들이 사울 앞에 성취되어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확증시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거역하면서 살았다. 그러자 하나님도 그를 버리시고, 대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인 다윗을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세우기를 작정하셨다. 사무엘이 다윗에게로 가서 기름을 부을 때 다윗 역시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되었다(삼상16:14)

그럼에도 사울에게 다시 성령이 임해서 예언하게 하신 기럭이 있다. 사무엘상 19장에는 다윗이 사울을 피해 라마로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울이 그를 잡으려고 사자들을 그곳으로 보냈다. 그때 하나님의 신이 사울의 사자들에게 임해 그들이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을 햇다. 두 번째 사자들을 보냈지만 마찬가지였고, 세번째 결과도 동일햇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사울이 그곳으로 갔는데, 그대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도 임해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예언을 했고, 사무엘 앞에서도 발가벗고 예언을 했다.

성령은 다윗에게도 임하여 예언하셧다. 그는 여호와ㅢ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혀에 있도다”(삼하23:2)라고 말했다. 그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해 예언을 하게 하셧다는 의미이다.

성령은 다윗의 30인의 용사 중 지도자인 아마새에게도 임하여 큰 곤경에 빠진 다윗을 위로하는 예언을 하게 하셨다(대상12:18) 스가랴에게도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돌아ㅅ넌 요아스 왕과 이스라엘을 크게 책망하셧고(대하24:20), 결국 스가랴는 이 예언 때문에 미움을 받아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다.

요엘은 말세에 하나님이 그 분의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실 것이요, 그래서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2:28). 이 예언은 실제로 사도행전 2장 오순절 다락방 사건에서 성취되었고, 베드로는 이 예언을 인용해 자기 주위에서 현재 일어나고 잇는 놀라운 일들이 바로의 성경의 성취하라고 역설하였다(2:16-18)

미가는 여호와의 신으로 채움 받아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는 예언을 했다.(3:8) 잠언 123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는데,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나의 말을 보이리라고 했다. 이는 성령이 사람들에게 부어질 때 그들이 예언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구약시대 사람들은 자의로 예언하지 않았다. 성령이 그들 위에 임했을 때 예언 했다. 예언을 통해 하나님의 정확한 뜻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도록 성령이 특별히 관여하신 것이다.

 

2.    표적 모티브: Sign Motif

 

하나님은 한 시대에 특정한 사람들을 택해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심으로 갖가지 이적들을 행하게 히셨다. 특정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그들 위에 성령의 권능을 입히셨다. 이러한 유형의 성령의 일하심은 주로 사사기에 등장한다.

      사사 웃니엘은 성령이 그에게 임하자 메소보다미아 ㅇ왕 구산리사다임과 싸워 대승했다(3:10). 사사 기드온도 성령이 그에게 임하자(옷 입힘을 받자) 미디안 군대를 대파했다(6:34). 입다라는 사사도 그에게 성령이 임하자 암몬 군대와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11:29)

표적 모티브에서 가장 흥미있는 인물은 삼손이다. 그에게는 다른 사사들에게서 볼 수 없는 특별한 예외성이 있다. 곧 그는 네번씩이나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었다는 점이다(13:25, 14:6, 19; 15:14). 이는 아마도 삼손이 다른 사사들보다 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하나님은 그 당시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대적 블레셋으로부터 그분의 백성을 구원해내기 위하여 위기를 만난 삼손에게 그때마다 특별한 성령의 권능을 입혀 주셨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임했던 성령의 능력을 갑절로 받고 나서 그의 스승 엘리야보다 더 큰 이적을 자주 행했다(왕하2:9-15).

이처럼 성령은 표적과 이사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세상에 효과적으로 나타내 보이셨다. 또한 가장 주된 목적인 하나님의 백성을 위기에서 구원해 내셨다.

 

1.    기능 모티브: Vocational Motif

하나님은 성막과 성전을 건축할 때 사람들에게 지혜와 재주의 을 주셔서 그들에게 맡겨진 일들을 잘 감당하도록 하셨다. 제사장의 옷을 만드는 자들은 모두지혜의 영으로 채움 받은 사람이어야 했다(28:3). 그중에 브살렐은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하여 지혜, 총명, 지식과 여러 재주들로 하나님의 성막을 짓는데 필요한 모든 공교한 일들을 잘 감당하였다(31:2-5; 33:30-33). 또한 다윗은 성령의 가리침을 받아 성전을 짓는 모든 식양들을 아들 솔로몬에게 전수해 주었다(대상28:22-19).

성령으로 채움을 받은 자들은 또한 성령으로 감동되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들로 묘사되었다(35:34). 또한 마음에 감동 받은 자들은 성막을 짓기 위해 예물을 가져오기도 했다(35:21)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이와 성전을 재건하게 하기 위해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 시키셨다(1:14). 하나님은 자신이 거하시면서 백성을 만나실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그분이 택하신 백성뿐만 아니라, 이방의 왕인 고레스의 마음까지 감동시키셨다(1:1, 3; 대하36:22-23).

이는 하나님의 성전을 짓거나 그 안의 기물들을 만드는 일은 사람의 지혜, 능력, 재주, 기술로는 안 되고, 오직 성령이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이나 하나님에 의해 성령으로 감동을 받은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곧 하나님의 성전 건축과 그와 관련된 성스러운 일들을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재주로만 감당할 수 있는, 전적으로 신적인 일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    메시아 약속 모티브: Promised Messiah Motif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연결되는 약속 모티브에는 세가지 중요한 개념이 있다. 첫째, 메시아 위에 임할 성령, 둘째, 메시아 시대에 위로부터 임할 성령, 셋째, 메시아 시대에 만인에게 임할 성령이다.

 

1)   메시아 위에 임할 성령

이 개념과 관련된 주요 성경 구절들은 모두 이사야에 있다. 11 1-5, 9-10절과 42 1-4, 6-8절이다. 장차 메시아 시대가 열리면 그 메시아 위에 성령이 임할 것인데, 그 영은 7중 성격을 지닌 신 곧 여호와의 신’, ‘지혜의 신’, ‘총명의 신’, 모략의 신’, ‘재능의 신’, ‘지식의 신’,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다(11:2)

그러면 왜 하나님이 그분의 영을 메시아에게 부어주시는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그 이유는 성령이 메시아 위에 임하셔서 그를 통한 완전한 공의( 11:4-5)와 여호와를 아는 지식(11:9)이 온 땅에 확산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메시아는 여호와의 종’(ebed Yahweh)으로 불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성령을 주셔서 그가 이방과 세상에 공의를 베풀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42:1, 3-4; 62:1-2)

 

2)   메시아 시대에 위로부터 임할 성령

메시아 시대에 성령은 메시아 자신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인 우리에게도 부어질 것이다(32:15). 그때에는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고 하나님의 공평이 광야에 거하게 된다(32:15-16)’

또한 이스라엘 자손에게도 성령이 그분의 복과 함께 부어질 것인데(44:3),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이 여호와께 속하였다고 말하고 손으로 쓸 것이라고 했다(44:5),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확신하게 되는 은혜는 바로 하나님이 그들 위에 성령을 부어 주신 결과인 것이다(39:27-29)

 

3)   메시아 시대에 만민에게 임할 성령

요엘 선지자는 메시아 시대가 도래하면 성령이 메시아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과 그 자손에게 부어질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초함한 만민 위에 부어질 것이라고 약속 했다(2:28)

그의 예언에 의하면, 그때에는 성령이 만민에게 부어져 예언과 이상과 이적과 기사가 크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망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으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신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질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플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리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2:28-32)

 

이 구절에서 만민늙은이젊은이그리고 남종여종을 대표한다. 즉 남녀노소를 포한한 모든 육체를 의미한다(2:17). 이런 메시아 시대에 나타나는 성령의 일하심은 결국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보편적 구원의 은총을 가져올 것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메시아 약속 모티브에서 성령은 먼저 메시아 자신에게, 그다음에는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마지막에는 만민혹은 모든 육체에게 순차적으로 그리고 점점 더 범위를 넓혀 부어진다는 점이 특징이다.

 

 

2부 성령을 받으라

3장 성령 세례

 

현대 교회사에서 성령 세례만큼 논쟁이 되는 주제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신학자와 교회들이 이 주제를 놓고 다투고 있다.

신학자와 교회들이 성령세례를 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모든 신자가 예수를 주로 믿고 거듭날 때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견해이다. 다른 하나는 성령세례는 거듭남(중생)과는 별도의 체험이라는 견해이다. 교파로 구분하면, 전자는 장로교회와 감리교에 속한 교회들이 그러하고, 후자는 이른바 오순절교회들이 그러하다.

    그러면 어떤 견해가 더 성경적인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두견해 다 성경적이다. 단지 성경에 기록된 성령세례에 대한 용어들을 양측 다 편협하게 취해 해석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일 뿐이다.

 

1.    성령세례를 나타내는 표현

성경에 사용된 성령세례에 대한 표현들은 다양하다. 따라서 성령세례에 대한 이견들이 생겼다. 성령세례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세례의 다양한 표현들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1)   성령으로 세례를 주다(받다)’라는 표현

세례 요한은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3:11; 1:8; 3:16; 1:33; 1:5; 11:16 참조)라고 말했다.

     바울도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또 다 한 성령으로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고 했다.

 

2)   성령을 받는다는 표현

빌립이 예루살렘에 교회에 밀어닥친 큰 핍박을 피해 사마리아로 내려가 복음을 전할 때 큰 부흥이 일어났다.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파송하고 그곳 사람들이 성령 받기를 기도했다(8:15). 이후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도착해 그곳 사람들에게 안수할 때 그들은 성령을 받았다.(8:17). 또한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을 방문해 말씀을 전할 때 이를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했다. 그때 베드로는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를 줌을 금하리요”(10:47)라고 말했다.

     예수님도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7:37-38)고 말씀하시면서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7:39)고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20:22)고 하셨다. 바울은 후에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3:2)라고 질문했다.

 

3)   성령이 임하다또는 성령이 내리다라는 표현

이 표현들은 주로 사도행전에 나타나는데, 결과적으로 권능을 받거나(1:8) 혹은 어떤 가시적인 현상이 수반된 것(8:16; 10:44; 11:15)을 암시하고 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에 돌아가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보고할 때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시더라”((11:!5)고 말했다. 두 경우 모두 어떤 가시적 현상이 나타났음을 암시하고 있다.

 

4)   성령을 부어 주시다또는 성령을 주시다라는 표현

이는 구원과 관련되어 성령이 주시는 주제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들이다. 특히 하나님이 이방인들도 구원하겠다는 그분의 주권을 행사하시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와 함께 왔던 할례받은 신자들이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 주신 것 때문에 놀랐다고 기록되어 있다(10:45).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부 바리새파 지도자들이 이방인에게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킬 것을 명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베드로는 이 사건을 인용하면서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서와 같이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셨다고 반박했다( 15:8).

        후에 바울은 성도들의 구원과 관련해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1:22)라고 했고,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5:5)라고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성령을 주셨다고 강조했다”(3:5; 살전4:8; 3:6). 좀 다른 표현이지만,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1:13) 라고 말함으로 구원과 성령이 밀접한 관계를 다시 강조했다.

 

1)   성령의 충만이라는 표현

성령충만에 대해서는 이 책 4장에서 더 상세하게 다룰 예정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이 표현의 사용에 관한 것만다루려고 한다.

    성령 충만은 성령세ㅖ와 관련해 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표현이다. 특히 사도행전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사도행전에는 오순절에 120명의 제자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을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니라”(2:4)라고 기록되어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과 장로들 앞에서 성령이 충만하여”(4:8) 복음을 변호했고, 후에 이를 동료들에게 보고할 때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4:31)했다.

예루살렘 교회가 최초로 7명의 집사들을 택할 때 조건들 둥의 하나가 바로 성령충만이었다(6:3,5). 스데반의 순교 직전에 성령이 충만하여”(7:55)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 그때 그리스도인 아나니아가 바울을 찾아와 안수하면서, “예수께서너로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9:17)라고 했고, 그때 그는 성령 충만을 체험 했다. 바울은 후에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바보라는 곳에 이르어 충독 서기오 바울에게 복음이때 바울이            을 전할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짖 선지자 박수가 이를 방해했다. 이때 바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13:9) 명령했더니 그는 눈이 머는 일이 일어났다.

    이 사건 후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자, 이를 시기한 유대인들이 그들을 핍박해 그 지역에서 쫓아냈다. 바울과 마나바는 그들을 향해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상황에서 불평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경은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13:52)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성령 충만과 술 취하는 것을 비교하면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라”(5:18)고 권면했다.

    누가복음에서는 성령 충만과 예언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1:41) 예언 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령 세례와 관련된 다양한 표현들 때문에 성령 세례를 한마디로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이 사실이다. 또 이로 인해 교회가 편견을 가지고 논쟁을 지속하고 있다.

 

1.   거듭남의 성령세례와 복음 전파의 성령세례

성령세례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을 면밀하게 연구해 보면, 크게 두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거듭남과 관련된 성령세례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 전파와 관련된 성령세례이다. 교회와 성도들은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만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교회와 성도들에게는 이 두가지가 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면 더 이상 자신이 속한 교단의 교리나 신학을 내세워 다툴 필요가 없다.

          그러면 거듭남과 관련된 성령세례와 복음 전파와 괸련된 성령 세례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1)   거듭남과 관련된 성령세례

‘’중생혹은 거듭남은 무엇인가?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분을 빋고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1:12). 그리고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1:13)이다.

예수님은 밤중에 찿아온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고 말씀하셨다.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거듭남의 개념으 ㄹ오해했다, 어떻게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냐고 질문했다. 그때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3:5)고 말씀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3:6-8)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첫 번째 출생은 육으로 난 것이고, 두 번째 출생 곧 거듭남은 성령으로 난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으로 난 사람을 바람과 비교하셨다. 바람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람이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람 자체는 볼 수 없으나 바람이 부는 현상은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며, 들을 수 있다. 성령으로 난 사람도 마찬가지다. 성령은 보이지 않지만 성령의 일하심으로 거듭난 사람의 변화된 모습은 볼 수 잇다. 언어 습관, 사고방식, 우주관, 역사관, 세계관, 가치관, 사생관 그리고 인생관이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거듭남은 절대적으로 성령의 일하심으로만 가능하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성령의 일하심 없이는 아무도 거듭날 수 없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고 말했다. 이는 성령의 일하심 없이는 아무도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없다는 뜻이다. 곧 성령의 일하심 없이 자기 지식이나 의지로 예수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더 나아가서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셨느니라”(고전12:13)고 말했다. 그 당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라는 표현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그리고 종이나 주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인종과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다 성령의 일하심으로 그리스도의 몸 혹은 그 분의 지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일하심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거듭남이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한 지체가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이 거듭나면 그 순간부터 성령이 내주하시게 되는데(8:9, 15), 이것이 바로 거듭남과 관련된 성령 세례이다.

 

2)   복음 전파와 관련된 성령세례

이 내용을 다루기 전에, ‘거듭날 때 한번 성령 세례를 받았으면 됐지, 또 다른 성령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느냐?’ 하는 문제를 먼저 상고해 보고자 한다.

      일부 신학자들과 교회들은 이 문제에 대해 필요 없다고 단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성경적 증거들이 있다.

      첫째, 복음 전파와 관련된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해 거듭남으로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기 위함이었다(3:11; 1:8; 3:16; 1:33), 그분은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위로부터 능력을 받을 대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명령하셨다(14:49; 1:4-8). 이는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제자들이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마가서 주님의 부활 소식을 전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있고, 받아야 할 것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신 것이다. 예수님 자신도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다(10:38; 4:1, 18).

둘째, 복음 전파와 관련된 성령세례는 거듭남과 관련된 성령 세례와 별개의 체험이다. 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이 복음 전파와 관련된 성령 세례를 받기 전에 이미 거듭났다는 증거들이 있다.

      마지막 만찬석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중에 베드로에게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씰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13:10)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15:3)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제자들이 이미 죄 씻음을 받아 의롭게 되었고, 거듭난 신분인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가 나오는 요한복음 17장을 보면, 주님은 제자들을 가리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세상과 분명하게 구분하셨다(17:6-9).

      예수님은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20:22)고 말씀하셨다. 이는 제자들이 그때 거듭났다는 증거이다. 그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24:49)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1:4-5)고 하셨다.

사도행전 8장에서 집사 빌립은 사마리아로 내려가 복음을 전했고, 많은 사람이 그를 통해 예수를 믿고 물세례를 받았다(8:12).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은 후에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온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성령을 받았다(8:17)

      따라서 복음 전파와 관련된 성령 세례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그것은 제자들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1:4) 권능을 받아 땅끝까지 복음 전파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8)

성경을 보면 베드로를 베드로를 포함해 제자들의 삶이 성령의 능력을 받기 전과 복음 전파와 관련된 성령세례를 받고 난 오순절 후가 천양지차인 것을 알 수 있다.

      오순절 이전의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하지 못한 비겁하고 소심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효과적인 복음 전파의 증인이 될 수 있겠는가. 그는 체포되어 끌려가신 주님이 심문받으시는 현장에서 사람들에게 세 차례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비겁한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졌고,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26:75)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시에 성령세례를 받은 후 베드로는 완전히 변화되었다. 그는 어느 장소에서든지 조금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예수는 그리스도시고 주시라고 전했고,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다. 옥에도 갇혔고 매도 맞았다. 그뿐 아니라 그는 순교하기 까지 담대하고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베드로의 설교 한 번에 3천명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2:41)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날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한(5:42) 이유는 바로 복음 전파와 관련된 성령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복음 전파와 관련된 성령 세례를 받고 권능이 따르는 증인이 된 것이다.

      유명한 개혁주의 설교자요 저술가인 마틴 로이드 존스는 그의 책(성령세례)에서 거듭남과 그가 능력세례라고 부른 복음 전파를 위한 성령세례는 분명히 구분되는 별개의 체함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람들이 능력세례를 받지 않고도 거듭난 신자들이 될 수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거듭날 때 필연적으로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말했고, 또 여전히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이처럼 분명하고 명백한 성경의 가르침을 피상적으로 스쳐 가기 때문이다.

만일 현대의 모든 교회들이 거듭남과 복음 전파를 위한 두 종류의 성령세례가 잇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불필요한 논쟁이 종식될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더욱 권능있고 활발하게 복음을 전파하게 될 것이다.

 

4장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

성령 충만은 성령세례 만큼이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혼동을 주는 주제이다. 어떤 이들은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을 동일시 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이들은 완전히 다른, 별개의 체험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성령충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령세례를 반복해서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들은 성경을 부분적으로 보고 편협하게 해석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들이다. 성경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성령 충만은 두 종류가 있고 그중 성령세례는 그중 하나에 속하는 것을 알 수 있다.

1.    성령 충만의 두 가지 용법

R. A, 토레이(Torrey)충만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가 두 종류이고, 이들은 각기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플레르’(pler-)라는 어근을 가진 단어이다. 전자는 장기적으로 계속적이며 연속적인 포화 상태를 위미하고, 후자는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충만함이다.

          토레이는 이를 쉽게 설명하여 전자는 내적 충만이고, 후자는 외적 충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내적 충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인격에 관한 것으로, 성령의 열매와 깊은 관계가 있다. 그러나 외적 충만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능력을 받고 무장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마이클 그린(Micheal Green)은 헬라어 단어들로 구분하지는 않았지만, 성령 충만을 비슷하게 둘로 나누었다. 첫째는 사람의 일반적인 성격을 암시하는 성령 충만으로, 가장 좋은 예는 예수님이시다(4:1), 이는 오순절 후 누가에 의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었다. 사도행전 6장에서 일곱 집사들의 자격을 망할 대 누가는 그들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6:3)하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6:5)이라고 기록했다. 그중에서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6:8) 행하였고,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6:10)했다고 묘사되었다. 그리고 그의 순교 직전 다시 성령이 충만하여”(7:15)라고 언급되었다. 바나바 역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11:24)로 묘사돤 유일한 사람이다. 마이클 그린은 이런 종류의 성령 충만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성령에 의해 계속 지배 받고 통제받는 사람의 성품과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이는 토레이의 구분처럼, 성령의 내적 충만이다.

          둘째는, 평생 동안 주어지는 성격이 아니라 잠시 동안 갑자기 임하는 성령 충만이다. 가장 좋은 예는 세례 요한이다. 사가랴에게 주어진 그의 관한 약속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는 것이었다(1:15).

          마이클 그린은 그 이유가 그가 주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의 소리였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즉 세례요한의 사명은 선지자적 기능을 감당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성령으로 덧입히고 무장 되었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엘리사벳과 사가랴가 성령 충만을 입었을 때도(1:41, 67) 같은 맥락에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두 경우들에서 다 성령의 충만이 주어진 것은 그들로 하여금 예언을 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예언과 관련된 성령 충만은 오순절 이후부터 복음 전파와 관련된 성령 충만으로 이어진다. 이에 대한 자섯 가지 예가 있다.

 

1)   오순절 날의 성령 충만(2:1-4)

제자들은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그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을 말했다. 이 사건이 온 예루살렘에 퍼져 많은 사람이 몰려왔고, 그 기회를 이용해 성령으로 충만해진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자 일시에 3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앗다. 이는 복음 전파를 위해 제자들이 성령 충만을 받은 예이가.

 

2)   베드로의 성령 충만(4:8)

베드로는 예수 부활의 소식을 전했다는 혐의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다음 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앞에 섯다. 베드로는 이미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지만, 이때 복음 전파를 위해 또 한 차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예이다.

 

3)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성령 충만(4:31)

베드로는 감옥에서 풀려난 후 자신이 대제사장과 장로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도를 담대하게 전한 것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 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이 보고를 들은 후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기도한 내용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것이었다(4:29), 성경에는 그 기도가 끝나자 마자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4:31)라고 기록되어 있다.이것 역시 복음 전파를 위해 초기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예이다.

 

4)   다소 사람 사울의 성령 충만(9:17)

사울은 다메섹에 있는 교회를 진멸하고 성도들을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고 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는 하늘로부터 비친 빛에 눈이 멀어 주님의 명령대로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 갔다. 거기서 아나니아라는 성도의 방문을 받았다. 아나니아가 안수할 때 사울은 성령으로 충만하게”(9:17) 되어 눈에서 비늘 갗은 것이 벗겨져 다시 보게”(9:18) 되었다. 사울은 며칠 동안 제자들과 함께 다메섹에 있다가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9:20) 했다. 이 경우도 역시 복음 전파를 위해 사울이 성령 충만을 받은 예이다.

5)   엘루마 앞에서 바울의 성령 충만(13:9)

다소 사람 사울은 후에 바울로 이름을 바꾸고,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바보라는 곳에 갔다. 거기서 총독 서가오 바울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짖 박수 엘루마가 이를 방해했다. 이때 바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13:9) 명령했더니 그의 운이 머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을 직접 목격한 총독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 사건 후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자, 이를 시기한 유대인들이 그들을 핍박해 그 지역에서 쫓아내었다. 사도행전에는 바울과 바나바가 저희를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떠날 때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13:52)라고 기록 되어 있다. 여기서도 성령 충만은 복음 전파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성경적 예증들은 후자의 성령 충만 곧 성령의 외적 충만이 복음 전파의 목적을 위해 주어지는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성령의 체험임을 확인해 준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 같처럼 성령 충만을 헬라어 두 단어 플레르플레쓰로 구분한은 것은 좀 문제가 있다. 물론 성령 충만에 지속적 충만’(내적 충만)잠정적 충만’(외적 충만)이라는 두가지 유형이 있다는 것에는 원칙적으로 동의 한다. 그런데 문제는 신약성경에서 때로는 플레르플레쓰를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충만하다라는 뜻의 헬라어 동사는 크게 플레로오’(plero), ‘핌플레미’(pimplemi), ‘플레쏘오’(pletho)가 있다. 토레이는 플레로오플레르에서 연원한 동사들이라고, ‘핌플레미플레쏘오플레쓰에서 연원한 동사들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전자는 지속적 충만을, 후자는 잠정적 충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W. E. 바인(Vine)플레르와 플레쓰를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지속조 충만을 의미하는 플레르에서 연원한 동사들이 때로는 잠정적 충만의 뜻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마태는 고기로 가득 찬 그물을 묘사할 때(13:48) ‘플레로오의 과거수동형 동사 에플로오쎄’(eplothe)를 사용했다. 요한도 향유 냄새로 가득한 집을 묘사할 때(12:3) 욕시 같은 동사 에플로오쎄를 사용했다. 그리고 누가는 오순절 날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갗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2:2)라고 기록했는데 여기서 사용한 헬라어는 플ㄹ[로오의 과거형 동사에플로오쎈’(eplothen)이다.

      고기로 가득 찬 그물, 향유 냄새로 가득한 집 그리고 바람 같은 소리로 가듯한 집 등은 모두 잠정적인 충만을 의미한다. 고기를 선창에 내리면 그물은 비워지고, 집 안에 가득했던 향내는 곧 사라지고 만다. 오순절 날 집안 가득 채웠던 바람 같은 소리도 곧 없어졌다.

      따라서 플레르플레쓰라는 헬라어 두 단어로 구분하는 것 보다는 마이클 그린의 논리가 더 이상적이다.물론 토레이도 성령 충만을 지속적 충만’(내적 충만) ‘잠정적 충만’(외적 충만)으로 구분했기 때문에 근본적인 개념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단지 플레르플레쓰라는 헬라어 두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기 있기 때문에. 이 단어들을 근거로 성령 충만을 둘로 구분하는 방식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2.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의 이해

신약성경을 보면 성령에 대한 계시가 점짐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가복음이 주로 복음 전파와 관련된 성령 충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바울 서신은 주로 그리스도인의 인격 혹은 성화와 관련된 성령 충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 진수가 바로 에베소서 518절에 담겨 있다. 바울은 술 위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말했다.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성령 충만은 성령세례도 아니고, 예언괴 방언 등 성령의 은사들과 관련된 것도 아니다. 마이클 그린이 바로 지적 했듯이, 이는 그리스도인의 행위에 대한 지침이다.

          바울은 먼저 술 취하지 말라라고 말함으로 술과 성령 충만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술에 취하면 술기룬이 그 사람을 제어한다.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성령의 제어를 받게 된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라는 말씀은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삶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전적으로 통제를 받도록 하라는 의미이다. 또한 충만을 받으라라는 헬라어는 플레오우스쎄’(plaousthe),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계속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하라는 의미이다. 이를 문법적으로 좀 더 자세하게 분석해 살펴보자.

          첫째, 이 동사의 시제는 현재형이다. 미 말은 곧 성령 충만이 단회적인 체험이 아니라 지속적인 체험이며 , 따라서 성령 충만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4:13) 이르도록 모든 그리스도인은 계속 성령의 통제를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과정은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 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어제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오늘 성령 충만함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오늘도, 내일도, 주님 만나는 그날까지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둘째, 이 동사는 명령형이다. 즉 성령 충만이 어떤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이라는 의미이다. 내가 원하면 받고, 싫으면 받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마치 대학교의 성택 과목같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셋째, 이 동사는 복수형이다.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 충만은 몇몇 특정 부류의 사람들만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소수의 선택된 특출한 목사들이나 전도자들만 성령 충만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평신도들도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평신도 차원에서 도저히 도달할 수 있는 고도의 영적 체험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도달할 수 있는 영적 체험이다.

          넷째, 이 동사는 수동형이다. 성령 충만은 우리 자신에게 주도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노력하고 훈련받는 것으로는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없다. 성령은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으로 계속 충만한 채 살아가려면 계속 갈구해야 한다. 자신을 전적으로 성령께 맡겨야 한다.

          그러면 성령 충만한 삶 곧 성령의 인도를 좇고 성령의 제어를 받는 삶은 어떤 것인가? 과연 스스로 성령 충만한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도 알게 할 수 있는가?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John Stoutt) <성령세례와 충만>에서 그 답이 에베소서 519절 이하에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성령 충만의 전반적인 결과들이 여기에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다. 성령 충만이 나타나게 되는 두 개의 중요한 영역은 예배와 교제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찬양할 것이고, 우리 아버지께 감사할 것이며, 서로에게 복종하게 될 것이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 및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하신다. 초자연적인 현상에서가 아닌, 바로 이런 영적인 특성들과 행위들 속에서 우리는 성령 충만의 우선적 증거를 찾아야 할 것이다.

 

바울은 19절 이하에서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달고 다니는 배지가 크게 세 가지라고 말한다. 첫째는 찬양이다. 바울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5:19)라고 말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의 삶은 바로 찬양이 충만한 삶인 것이다. 둘째는 감사이다(5:20). 성령 충만한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다.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순경이나 역경이나 모든 상황 속에서 감사하는 삶을 산다. 바울처럼 발이 착고에 차여 깊은 옥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도 감사로 찬송할 수 있는 삶이다. 마지막은 겸손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21)고 말했다. 피차 복종은 모두가 겸손할 때 가능하다. 실제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겸손하게 처신한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서, 자녀와 부모의 관계에서, 종과 상전의 관계에서 겸손한 자세를 갖는다(5:22-6:9).

          이것이 바로 지속적으로 성령에 의해 통제를 받는 사람의 갊의 모습이다. 이런 사람은 자연적으로 성령의 열매(5:22-23)를 맺게 된다.

 

 

 

5장 성령 세례와 방언

성령 세례 곧 복음 전파와 관련된 성령세례를 방언과 동일시하여 가르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방언을 말하지 못하면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성령 세례가 방언 그 자체라는 가르침은 성경이지 않다.

 

1.    성경 속 성령세례의 사례

사도행전에는 성령세례를 받은 사례가 모두 다섯번 나온다. 첫번째 사례는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2:1-4)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렸던 120명의 제자들은 오순절 날 성령세례를 받았다. 첫 성령세례의 체험은 정말 톡특한 것이었다. 우리는 성경의 기록을 통해 그 세가지 독특한 현상들을 대하게 된다. 즉 가청적(audible) 현상, 가시적(visible) 현상, 그리고 가성적(speakable) 현상이다. 제자들은 강하고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를 들었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을 보았으며, 자신들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다른 방언을 말했다. 이 첫 번째 사례는 제자들이 성령 세례를 받을 때 제자들이 성령 세례를 받을 때 방언을 말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두번째 사례는 사도행전 8장에 나온다. 예루살렘 교회는 빌립을 통해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보고를 받고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했다(8:14). 사마리아에 내려간 베드로와 요한은 그곳 사람들이 성령 받기를 위해 기도했다. 이는 그들 누구에게도 성령을 내리신 일이 없었고, 그들은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기 때문이다(8:16).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은지라”(8:17).

성경에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을 때 방언을 망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미국 하나님의 성회 총회장 죠지 우드(Goerge Wood)는 사도들이 안수하자 사람들이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마술사 시몬이 돈을 내며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주소서”(8:1-8)라고 구한 것은 그가 성령이 임할 때 어떤 외적 증거들을 보았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말했다.

세 번째 사례는 사도행전 9장에서 바울이 아직 사울일 때에 다메섹에 있는 교회들을 진멸하고 성도들을 예루 살렘으로 잡아오기 위해 가던 중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회심하게 된 사건이다. 그는 다메섹에서 주의 제자 아나니아를 통해 성령을 받았다. 이 경우에도 성경에는 바울이 이때 방언을 말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조지 우드는 귀납법 추론을 사용하면, 바울이 후에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말한 방언이 그의 정기 기도 생활 중에 한 부분이었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고 말했다.

바울은 또한 방언이 자신의 기도 생활 중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것을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14:18)

네 번째 가례는 사도행전 10장에 나온다. 이는 고넬료를 포함해 이방인들이 최초로 성령을 받는 것에 관한 기사이다.

하나님은 고넬료와 그집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고넬료와 베드로 enn 사람에게 모두 환상으로 지시하셨다. 고넬료는 이 지시에 순종하여 하인들을 욥바에 있는 베드로에게 보내 올 것을 청했다. 함편 베드로도 이방인 고넬료에게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인하고 그의 집으로 갔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임했고,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 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성경은 그때 나타난 현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10:46)

이 경우에는 고넬료와 그 집 사람들이 성령을 받을 때 분명히 방언을 말했다는 증거가 제시 되었다.

다섯 번째 사례는 사도행전 19장에 나온다. 바울은 제3차 전도 여행중 에베소에 도착해 요한의 제자로 보이는 이들을 만났다.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지만 그들은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바울이 재차 너희가 무신 세례를 받았느냐고 묻자

그들은 요한의 세례로라고 대답했다(19:1-3).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에 세례를 주었고  안수할 때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이 경우도 요한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을 때 방언을 말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이 성령을 받을 때 방언을 말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을 선입관이나 편견을 버리고 살펴보면 방언이 마치 공통분모처럼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배제할 수 없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세례의 다섯가지 사례

사도행전 장소 대상 방언 그 외 현상들
2 예루살렘 사도들 포함 120명 제자 말함 가청적, 가시적
8 사마리아 사마리아 성도들 없음  
9 다메섹 후에 바울이 된 사울 없음  
10 가이사랴 고넬료와 그의 식솔들 말함 하나님을 높임
19 에베소 요한의 약 12명의 제자들 말함 예언

 

2.   방언과 성령세례의 삼관관계

미국의 하나님의 성회이와 같은 사례들을 근거로 해서 방언이 성령 세례의 처음(외적) 증거라고 헌법에 규정했다. 이는 방언이 성령세례 자체는 아니지만 성령 세례를 받을 때 나타나는 처음 (외적)증거로 수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과연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것인 것?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제지된다. 또한 성령 세례의 주목적인 복음 전파로 효과적인 결실을 맺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방언을 말하지 못하면 성령 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단정해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도 나올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다섯 가지 사례 중에서 세 가지 사례는 아주 분명하게 성령을 받을 때 방언을 말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면 성령이 성경 기자들로 하여금 그 부분을 놓치지 않고 꼭 명시하도록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32ㅏㅇ 성령 세례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성령 세례의 주 목적은 복음 전파이다. ‘땅끝까지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제자들과 성도들이 권능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즉 성령을 받는 모든 사례는 복음 전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각 개인의 개성 혹은 자아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목회 현장에서 경험한 바에 의하면, 자기 개성 혹은 자아가 아주 강한 사람들은 방언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막곤 했다. 성경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2:4)라고 기록하고 있다. 방언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관, 신학적 편견 등으로 성령이 바언을 말하도록 하시는 것을 스스로 억제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동역자들과 함께 이 같은 경우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그들은 성령도 못 말리시는 사람들ㅇㅣ라고 우수갯말을 했는데, 그때 대부분이 동의하면서 웃은 적이 있다. 고린도전서 1432절은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라고 했다.

      따라서 방언은 성령세례의 처음 증거보다는 성령세례를 받을 때 가장 많이 나타나는 보편적 증거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 높힘혹은 예언으로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전통이나 학설 혹은 개인의 체험이라도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부합되지 않으면 무가치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성령세례를 주시는 주목적이 바로 복음 전파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3부 선물을 주시다

6장 성령의 은사들

성령의 은사들을 말할 때는 먼저 교회를 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는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1:22-23).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일들을 잘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다.

교회가 이 책임을 성취할 수 있도록 주님은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은사들이다. 조지 우드는 성려의 은사들은 그 맡기신바 교회의 직무를 성취하도록 하기 위해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정의 했다.

 

1.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용어들

먼저 성령의 은사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성경에서 은사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여섯가지 용어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1)   신령한 것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고전12:1)라고 말했다. 이 구절의 신령한 것에 사용된  헬라어는 프뉴마티콘’(pneumatikon)으로, 이 단어의 이 불분명해서 신학자들의 해석이 갈리고 있다.

일부 신학자들은 고린도 전서 14 37절에 등장하는 프뉴마티코스남성 명사로 신령한 자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장 칼뱅(John Calvin)을 포함한 다른 신학자들은 고린도전서 14 1절에 사용된 퓨뉴마티카가 중성 명사로 은사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퓨뉴마티콘에 대한 주장들이 있지만 문맥상으로 이 단어는 은사들로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은사들

바울은 은사는 여러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12:4)라고 말했다. 여기서 은사를 뜻하는 단어 카리스마톤’(charismaton)이란 말은 원래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charis)에서 연원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애용해 바울 서신에서만 사용하였다.

성령의 은사들은 무조건적인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은사를 받았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또한 상 받을 것을 기대해서도 안 된다. 단지 성령의 은사를 잗은 사람들은 교만함과 우월감이 아닌 겸손함과 감사함으로 이를 잘 사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한다.

 

3)   직임들

바울은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고전12:5)라고 말했다. ‘직임을 의미하는 디아코니온’(diakonion)은 은사들의 직능적인 의미를 가지며,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님을 섬기기 위한 직임과 봉사들을 뜻한다. 주님은 자신의 몸인 교회의 일을 잘 감당하도록 사람들을 부르고 세워 각각 직분을 맡기신다. 바울은 이 직분들에 3대 목표가 있다고 말한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셧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4:11-12)

곧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는 것이다.

 

4)   역사들

바울은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12:6)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역사를 뜻하는 에네르게마톤’(energematon)은 교회의 직부들을 잘 감당하도록 주님이 주시는 혹은 능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령의 은사들은 내 힘이 아닌 위로부터 공급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내가 배우고 경험한 것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그분이 맡기신 일들을 감당하는 것이다.

 

5)   나타남

바울은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신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고 말했다. ‘나타남을 뜻하는 파네로시스’(phanerosis)는 성령의 은사들이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할 때처럼 가시적으로, 가성적이며, 가성적인 현상들로 나타날 수 있음을 뜻한다. 성령의 은사들은 이를 행하는 사람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생생한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따라서 성령의 은사들은 사변적으로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이다.

 

6)   선물들

바울은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4:7-8)라고 말했다. ‘도마타’(domata)선물을 뜻하는 도마’(doma)의 복수형으로, 성령의 은사들을 가리킬 때 누가와 바울이 애용했던 단어이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2:38)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힘을 들음이러라”(10:45-46).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흭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7:9-11).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도행전 2 38절과 10 45절의 번역과 해석 문제이다. 개혁한글 성경에는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라고 번역되었다.

       먼저 사도행전 2 38절을 살려보자. 여기서 성령을 헬라어 성경에서는 투 하기우 퓨뉴마토스(tou gagiou pneumatos)라고 하는데, 이를 목적격 명사로 보느냐, 소유격 명사로 보느냐에 따라 선물에 대한 해석이 크게 달라진다. 만일 성령을 목적격 명사로 보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는 해석이 나오고, 성령을 소유격 명사로 보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라고 해석할 수 있다.

       고버트 해나(Robert Hanna)성령을 의미하는투 하기우 퓨뉴마토스선물을 뜻하는 텐 도레안’(ten dorean)이 동격의 소유격으로 사용 되었기 때문에, 이 구절의 해석은 선물’, 곧 성령을 받으리라고 해야 한다 말했다.

       그러나 투 하기우 퓨뉴마토스는 소유격 명사로 해석해야 한다. NIV 성경은 이 구절을 ‘You will receive the gift of the Holy Spirit’(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다)이라고 번역하였다. 따라서 이 구절은 성려을 선물로 받으리라대신에 성려으이 선물을 받으리라로 해석해야 옳다.

       사도행전 10 45절에는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라고 되어 있는데, 역시 잘못된 번약이다. 여기에서도 헬라어 성경은 헤 도레아 투퓨뉴마토스’(he dorea tou pneumatos)로 되어 있다. KJV, NIV 성경에서처럼 성령의 선물을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라고 번역해야 옳다. 신약성경에서 도마타도레아는 다 선물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앞에서 살려본 것처럼 두 단어는 모두 성령의 은사를 가리킨다.

 

1.    성령의 은사들의 종류

그러면 이제 성령의 은사들의 종류에 대해 살펴보자. 신약성경은 많은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적어도 22개의 은사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 은사들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표적과 관련된 은사들, 둘째, 직임과 관련된 은사들, 셋째, 봉사와 관련된 은사들이다.

구분 4;11 고전7:7 고전12:8-10 고전12:28-30 12:6-13 벧전4:11
1 사도     사도    
2 선지자     선지자    
3 전도자          
4 목사          
5 교사     교사 가르침 말함
6     지혜      
7     지식      
8     믿음      
9     병 고침 병고침    
10     능력 행함 능력 행함    
11     예언   예언  
12     영들 분별      
13     각종 방언 방언    
14     방언 통역 방언 통역    
15         섬김 섬김
16         권위  
17         구제  
18       다스림 다스림  
19         긍휼  
20       돕는 것    
21         손 대접 손대접
22   독신        

 

 

1)   표적 은사들(Sign gifts)

표적과 관련된 은사들은 고린도전소 12:7-11절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로 잘 알려진 것들이다. 이 은사들도 다시 셋으로 세분할 수 있다.

a)    직관적 은사들(Intuitive gifts)

직관적 은사들에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와 지식의 말씀의 은사 그리고 영들 분별의 은사가 포함 된다. 이 은사들은 공부를 많이 하거나 경험을 쌓아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비밀스런 일들을 알게 하시거나 드러나게 . 신다. 때로는 성령의 일들과 악한 영들의 일들을 잘 헤아려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신다.

 

직관적 은사들 이적의 은사들 언어적 은사들
지혜의 말씀 믿음 예언
지식의 말씀 병 고침 각종 방언
영들 분별 능력 행함 방언 통역

 

 

지혜의 말씀. 이 은사는 성령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성도들에게 주시는 것이고. 성도들은 그 지혜를 통해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나 환경을 해결 나갈 수 있다.

 

열왕기상 3장을 보면, 솔로몬이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두 여인의 재판을 맡는 사건이 나온다. 두 여인은 같은 집에서 살았고, 똑같이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그중 한 여인의 아이가 죽었다. 아이를 잃은 여인은 다른 여인이 잠자는 틈을 타 죽은 아이를 산 아이와 바꿔치기를 했다. 문제는 이 광경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정말 재판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신하들에게 칼을 가져오라 하였고, “산 아들을 둘로 나눠 반은 이 여인에게 주고 반은 저 여인에게 주라고 명령했다. 이 말을 들은 진짜 어머니는 아들이 죽는 것이 안타까워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하고 간청 했다. 그러나 다른 여인은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고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솔로몬은 산 아이를 다른 여인에게 주라고 간청한 사람이 아이의 어머니라 말하고, 아이를 그에게 주라고 판결 했다(왕상3:25-27).

성경은 솔로몬의 이 재판이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분명하게 증언한다.

 

  온 이스라엘이 왕의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왕상3:28).

 

요한복음 8장에는 서기관 바리세인들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끌고 와 고소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예수님께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8:5)라고 물었다. 성경은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8:6)고 밝힌다. 사실 예수님이 그 여인을 놓아 주라고 말씀하시면 그들은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을 어겼다고 고소할 참이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그 여인을 돌로 치라고 말씀하실 분도 아니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점을 노렸다. 그런데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8:7)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껴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고, 결국 예수님과 그 여인만 남게 되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8:11)고 말씀 하셨다. 얼마나 놀라운 지혜인가!

  또 한 가지 예는 사도행전 15장 예루살렘 공회 때 있었던 일이다. 당시 초대교회는 이방인도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느냐는 아주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논쟁하고 있었다. 바리새파 중 어떤 사람들은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15:5)고 주장 했다. 반면에 베드로는 왜 이방인 형제들에게 자기들의 조상과 자신들도 메지 못했던 멍에를 지게 하느냐고 반박 했다. 그리고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15:11)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후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이 어떻게 이방인 중에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는지에 대해 간증했다. 그러고 나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가 하나님의 지혜로 양측의 갈등을 봉합함으로 큰 문제를 증식시켰다.

  이처럼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어려운 문제들을 극복하고 해결하며, 불신자들의 계략들을 무산시키고, 교회가 일치하고 화합하도록 만든다.

 

지식의 말씀. 이 은사는 책이나 학교 공부를 통해서 얻는 세상적인 지식과 다르다. 때때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상황이나 문제속에서 성령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지식 혹은 신지식을 주신다.

  몇 가지 예들을 성경에서 찾아보자. 열왕기하 6장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과 아람은 적대 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아람 왕이 작전을 세워 군대를 보내면 그때마다 이스라엘 왕이 이를 알고 대처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아람은 번번히 작전에 실패했다. 아람 왕은 아마도 자기 신하들 중에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고는 크게 진노했다.

몇가지 예들을 성경에서 찾아보자. 열왕기하 6장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과 아람은 적대 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아람 왕이 작전을 세워 군대를 보내면 그때마다 이스라엘 왕이 이를 알고 대처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아람은 번번이 작전에 실패했다. 아람 왕은 아마도 자기 신하들 중에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고는 크게 진노했다.

그때 한 신하가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왕하6:12)라고 말했다. 즉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하나님의 지식으로 비록 먼 곳에 떨어져 있어도 아람 왕과 그의 신하들이 은밀하게 세우는 작전즐을 모두 듣고 알 수 잇엇다는 것이다.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는 그의 충성된 부하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해 간음죄를 범한 것이었다. 다윗은 밧세바가 임신 것을 알고 나서 이를 아무도 모르게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최전방에 세워 전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밧세바를 궁으로 불러들여 아내로 삼았다.

당시 왕은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었고, 이 일이 비밀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아무도 몰랐다. 다윗은 그렇게 1년 정도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살았다. 그의 영적 감각은 무뎌졌고, 영적 상태는 파산 직전이었다. 그때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셨다(삼하12:1).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다윗이 범한 일련의 은밀한 죄들을 다 알려 주셨다는 뜻이다(삼하12:12),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가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했고, 셜국 다윗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회복되었다.

이처럼 지식의 말씀은 성도를 회개하게 하여 회복시키고 살리는 일을 한다.

이 은사와 관련해 성경에는 충격적인 사건이 나온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즉결심판 사건이다.

그들은 다른 성도들이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는 것을 보고 따라 행했다. 그러나 소유를 판 돈 중 일부는 감추고 나머지를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그때 베드로는 하나님의 지식으로 아나니아를 크게 책망했다.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는 네 임의로 할 수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짖말한 것 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5:3-4)

이 말을 듣고 아나니아는 죽었다. 그리고 세 시간쯤 지나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그의 아내 삽비라가 들어왔다. 베드로가 그땅 판 것이 이것 분이냐 내게 말하라하니 삽비라는 예 이뿐이로라고 대답했다(5:8). 베드로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으 ㄹ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5:9)하니 삽비라도 죽었다.

  성경을 보면, 베드로는 하나님의 지식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함께 꾀하여”(5:9) “성령을 속이고”(5:3) 땅값 얼마를 감춘 것을 알았다. 베드로는 그들의 죄가 즉결심판을 받을 만큼 중한 것은 사람에게 거짖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한 것이 때문이라고 말했다(5:4)

 

영들분멸. 이 은사는 단수로 이 아니라 복수로 영들이라고 사용된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영의 세계에는 여러 영들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영들이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성령은 물론, 사탄과 그 사자들의 영, 사람의 영이 포함된다. 여기에는 성령은 물론, 사탄과 그 사자들의 영, 사람의 영이 포함된다. 사탄과 그 사자들의 영은 더러운 영’, ‘거짖말하는 영’, ‘미혹하는 영’, ‘병들게하는 영’, ‘점치는 영’, ‘악한 영등이 있다.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가 필요하다. 요한일서 41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짖 선지자가 나왔음이니라고 말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거짖 선지자가 많았다. 그러므로 교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는 신앙적인 교훈, 영적인 교훈들에 대하여 분별하는 일이 필요했다. 더욱이 당시는 아직 신약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교회를 거짖 선지자들의 미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분멸하는 은사가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이 은사는 특별히 양들을 악한 세력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은사이다.

그러면 어떤 영들을 분별해야 하는가? 먼저, 성도들에게 접근하여 자기가 하는 말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고 기만하는 자들이 있다. 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의 메시지가 과연 하나님이 주신 말씀인지, 아니면 자신들이 지어낸 말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은 에베서 교회 장로들에게 자신이 떠난 후에 순진한 양 떼를 속이고 영혼들을 훔쳐 가는 흉악한 이리 같은 자들이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올 것을 예견하고, 장로들에게 이를 잘 대처하라고 당부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20:29-29).

자신의 말을 마치 하나님께 받은 메시지처럼 꾸며 거짖으로 예언하던 거짖 선지자들은 구약세대에도 있었다. 예레미야는 이런 사람들을 분별하여 그들을 배격하라고 말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돤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23:16).

사도행전 8장에는 마술사 시몬이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빌립이 사마리아에 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듣고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으며 빌립을 진심으로 다랐다(8:13). 그러나 그는 베드로와 요한의 안수로 사마리아 성도들이 성령을 받자 사도들에게 돈을 주며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8:19) 하고 요청했다. 그때 베드로는 그를 책망하며 이렇게 말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8:20-21).

 

그리고는 시몬의 영적 상태를 정확히 지적하며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8:23)라고 덧붙혔다. 베드로는 시몬이 악독하고 불의한 영에 붙잡혀서 이런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즉 베드로는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를 가졌는데, 이는 성령을 말미암은 것이었다.

바울은 성령의 지시를 받아 빌립보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파하는데, 한 여인이 연일 뒤쫓아 오면서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파하는 자라”(16:17)하고 소리 질러 말했다.

낯선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바울 일행의 정체와 그 임무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려 주는 사람을 만났으니 기이한 생각과 고마운 마음을 들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은 정 반대였다. 그 여인의 행동을 심히 괴롭게 여겼다. 바울은 그 여인 속에 점치는 영이 접촉되어 말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16:18) 하니 귀신이 즉시 나왔다. 바울 역시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를 가졌고, 이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책망받은 사건은 영들을 분별하는 척도가 무었인가를 알게 해 준다. 예수님의 공적 생애가 끝날 때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일을 예고하셨다.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 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순간,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만류하며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16:22)라고 했다. 이에 예수님은 돌이키며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16:23)라고 하며 꾸짖으셨다.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는 베드로의 행동은 조금도 탓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제자로서 마땅히 취할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스승이 장로들과 서기돤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참혹하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제자된 도리로서 침묵을 지킬 수는 없는 일이다. 입 다물고 있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일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가 하는 말이 사탄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 드려내셨다.

여기서 우리가 분면히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의 뜻을 부정하는 말은 사탄에게 접촉되었거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부정하는 말은 그 출처가 사단이다. 유명한 목사나 학자가 말한다고 해도 성경에 어긋나는 말은 사탄에게 접촉되었거나, 그의 영향을 받은 말이라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가 기이한 일을 행하고 많은 사람을 이끌지라도 성경 말씀을 외곡되게 가르치고 혼잡하게 하면 악한 영에게 접촉된 것으로 알면 된다. 그러면 영들 분별의 은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질병은 귀신이 가죠다준 것이라고 주장하며 가르친다. 그러나 이는 아주 그릇된 견해이다. 질병은 사고로 생길 수도 있고, 병원체에 감염되어 생길 수도 있고, 뇌신경 손상으로 생길 수도 있고, 귀신 들려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잘 분별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무당이나 박수 혹은 귀신 들린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하는 말을 종합해서 하나의 교리를 만들어 가르치기도 한다. 그리고 이를 분별하지 못하고 도리어 추종하는 자들이 있다.

말세에는 영들 분별의 은사가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디모데전서 4 1절은 경계하기를,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라고 했다.

 

b. 이적의 은사들(Miraculous gifts)

이적은 은사들에는 믿음의 은사와 병 고침의 은사와 능력행함의 은사가 포함된다. 이 은사들은 사도행전의 중요한 주제들 중의 하나인이적과 기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믿음. 성경은 믿음을 크게 셋으로 구분한다.

첫째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을 수 없었던 성경을 믿고,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 믿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

이는 또한 이신득의(以信得義)의 믿음이다.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길은 율법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3:28)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울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2:16)

 

그러나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믿음의 은사와는 다른 것이다.

둘째는, 인내를 낳는 믿음이다. 믿음으로 인한 인내에 대해서는 성경에 많은 예들이 있다. 먼저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방주를 건조한 노아가 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쫓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11:7)

또한 모든 믿는 자들의 조산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이 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25년을 기다려 결국 100세에 이삭을 선물로 받았다. 그의 믿음을 바울은 이렇게 정의 했다.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4:17)

아브라함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고 또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심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고, 이루어질 수도 없는 일이 그대로 성취될 것을 인내하며 기다렸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느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으 ㄹ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4:18-22)

믿음으로 인한 인내를 말하려면 욥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의인이었지만 보통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고난을 당했다. 재산을 다 잃고, 자녀들도 잃었으며, 심한 육신적 고통도 당했다. 게다가 그의 아내까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2:9)고 했다. 그러나 욥은 오히려 아내를 책망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믿음을 져버리지 아니 하였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법죄치 아니하니라”(2:10)

욥의 인내의 믿음은 욥기 23 10-14절에 잘 나타나 잇다. 엽은 자신이 당하는 극심한 고난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고 또한 하나님이 자신을 단련하시는 것이라고 믿었다.

          나의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23:10)

 

욥은 풀무에 들어간 금이 단련된 후에 정금이 된다고 확신있게 말했다. 현재는 고난으로 괴롭고 어렵지만, 결국 하나님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기다렸다. 그의 인내의 믿음은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23:13)라는 고백과 그러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23:14)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다. 믿음에 의한 인내의 결과로 욥은 갑절의 복(42:10) ‘처음보다 나중이 더 잘되는 복을 받게 되었다(42:12). 또한 그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얻었다(42:13).

그러나 인내를 낳는 믿음은 갈라디아서 522절에 나오는 오래참음과는 다르다. 오래 참음은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이고, 은사는 아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오래참음은 신앙 인격에 관한 것이고, 믿음의 은사는 능력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인내를 낳는 믿음은 은사보다는 열매와 더 깊은 관계가 있다. 이 믿음은 인내와 연단을 통해 성도들의 신앙 인격을 성숙하게 만든다.

셋째는, 능력 혹은 기적이 나타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바로 믿음의 은사에 속한 것이다.

믿음의 은사로서 능력 혹은 기적이 나타나는 믿음을 논하기 전에 먼저 다뤄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믿음의 은사와 능력 행함의 은사를 어떻게 구분하느냐의 문제이다. 둘 다 능력 혹은 기적과 관련되어 있고 또한 믿음을 기반으로 행하는 은사들이리는 면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두 은사들 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믿음의 은사는 성격상 수동적이고, 능력 행함의 은사는 능동적이다. 곧 믿음의 은사는 능력 혹은 기적이 나타나는것이고, 능력 행함의 은사는 능력 혹은 기적을 행하는 것이다.

두 은사의 차이를 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각 은사마다 예를 하나씩 들어 살펴보겠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졌다. 더군다나 사자들을 굶겨 놓았기 때문에 그는 곧바로 사자 밥이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기적이 나타났다. 사자들은 다니엘을 잡아먹지 않았고, 옷자락 하나 해하지 않았다.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즛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6:23)

다니엘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기적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줄곧 수동적인 태도로 단지 하나님을 의뢰했다. 그러자 사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다니엘의 몸을 상하게 하지 못했다.

          한편 엘리사는 능동적으로로 믿음을 행사 해 수많은 기적들을 행했다. 여기서 행하다라는 표현이 중요한데, 이는 능력 행함의 은사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엘리사는 이스라엘과 아람 사이에 전쟁이 있을 대 기도함으로써 아람 군대의 모든 군사들의 눈을 멀게 하는 기적을 행했다.(왕하6:18). 그리고 그 무리를 사마리아의 이스라엘 왕 앞에 데리고 가서 다시 기도해 눈을 뜨게 했다(왕하6:20). 엘리사는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여 주시도록 믿음으로 담대하게 기도했고, 기도한 대로 이루어졌다. 이것이 바로 능력 행함의 은사인 것이다.

그러면 큰 능력과 기적이 나타나는 믿음의 은사에 대해 좀 더 대조하여 살펴보자.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실 때 백부장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는 예수님께 중풍에 걸려 고생하고 있는 하인을 고쳐 달라고 요청 했다. 예수님은 즉각적으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8:7)고 말씀하셨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매우 기뻐하면서 예수님을 모시고 갔을 텐데 백부장은 달랐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겟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8:8-9).

예수님은 그의 범상치 않은 믿음을 보시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라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8:10)고 칭찬 하셨다. 그리고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음 대로 될지어다”(8:13)라고 말씀하시자, 즉시 하인이 고침을 받았다. 여기에서도 백부장은 수동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예수님께 보였을(presenting) 뿐이었다. 그러나 먼 곳에 있는 하인에게 기적이 나타났다. 중풍이 고침 받은 것이다. 백부장이 한 일은 단지 예수님께 사정을 아뢰고 믿은 것뿐이었다.

          마태복음 9장에는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사람들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9:2) 그 중풍병자를 고져 주셨다.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9:2)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9:607).

이 때도 역시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한 일은 없다. 그들은 오직 예수님께 자신의 믿음을 보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께 보인 믿음으로 중풍병자는 일어나 집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열두 해 동안 형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은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분의 겉옷 가를 만졌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9:22)고 말씀하셧고, 그 순간 여인은 고침을 받았다.

성경에는 이 같은 예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이처럼 믿음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큰 능력과 기적이 나타난다. 단지 ㅁ능동적으로 행하기보다는 수동적으로 믿음을 보인 것이다.

 

병고침(신유).

이 은사에 대해서는 이 책 7장에서 상세하게 논의하고, 여기에서는 개괄적인 면만 다룰 것이다. 그리고 병 고침의 은사와 신유의 은사는 동의어이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신유의 은사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하겠다.

한글판 성경에는 병 고침이라고 단수로 번역되어 있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야마톤’(iamaton)이 사용 되었다. 이는 복수 명사로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병 고침들이다. 이는 질병의 종류가 다약하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리고 은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마타’(charismata) 또한 복수 명사로, 이 은사는 다양한 종류의 질병들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고, 치료의 방법들도 다양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마도 신유의 은사는 단지 사람의 육체적 질명뿐 아니라 영혼과 정신적인 질병들까지 치료하는 전인격적인 속성 때문에 두 단어에 다 복수 명사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질병의 종류를 구분하면, 크게 영혼의 병’, ‘감정적인 병’, 육신의 병’, 마귀 들림의 병’, 이렇게 네 가지가 있다. 그리고 질병을 고치는 방법들도 여러 가지가 있다. 의학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방법, 기도 혹은 안수의 방법, 기름을 붓고 기도하는 방법, 상담의 방법 그리고 구마(驅魔)의 방법 등이다.

따라서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모든 종류의 질병을 다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한 가지 방법만 사용해서도 안된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환자에게 그들이 어던 이유로 병에 걸렸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무조건 마귀를 쫓는 구마의 방법만 사용하는데, 이는 옳은 방법이 아니다.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암이나 중풍 같은 큭정 질병에서 은사가 도 강력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악령들에게 사로 잡힌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데 은사가 더 강력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능력행함.

이 은사는 앞서 살펴 보았듯이, 믿음의 은사와 구별된다. 두 은사 모두 믿음에 근거하지만, 능력 행함의 은사는 능동적인 것이다.

 

능력 행함의 헬라어는 에네르메마타 뒤나메온’(energemata dunameon)인데, 이는 권능혹은 능력을 의미한다. 영어의 다이너마이트가 여기에서 나왔다.

영어판 성경들은 뒤나메온기적’(miracle)으로 번역했다. Kjv 성경은 기적들을 행함’(miraculous of miracles)으로, NIV 성경은 기적적인 능력들’(miraculous powers)로 번역했으며, NASV 성경은 기적들의 성취’(the effecting of miracles)로 번역 했다. 그러므로 능력 행함의 은사는 다른 말로 기적의 은사라고 불려도 무방하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능력 행함의 은사와 표적기사가 함께 사용된 예들이 여러 곳에 나온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2:22).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8:13)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갘히 말하지 아니하노라”(15:18)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12:12)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2:4).

 

복음서 중에서도 특별히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기적들을 푲ㄱ으로 기술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들은 예수님께 표적 보여 주기를 원했다(12:38; 16:1; 8:11). 예수님은 심지어 거짖 그리스도들과 거짖 선지자들도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택하신 자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24:24). 예수님이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 또한 표적으로 기록도;었다(2:11).

          이 밖에도 요한복음에서는 계속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표적이라고 기술해 기적표적이 동의어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2:18, 23; 3:2; 3:2; 4:48, 54; 6:2, 14, 26, 30; 7:31; 9:16; 10:41; 11:47; 12:18, 37; 20:30). 이때 사용된 표적에 해당하는 핼라어 세메이온’(semeion)은 공관복음에 많이 사용된 능력혹은 권능을 듯하는 뒤나미스와 함께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질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17:20)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14:12)고 하셨다.

          그러면 능력 행함의 은사에 대한 성경의 예들을 살펴보자. 야고보는 열왕기상 17-18장에 기록된 선지자 엘리야가 큰 능력을 행한 것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이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15:17-18).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집에 가서 통에 가루와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게 하는 기적을 행했고. 그 과부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는 큰 기적을 행했다(왕상 17:16-23). 또한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과 갈멜 산에서 영적 대결을 할 때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바알이 참하나님이신지, 자신이 믿는 여호와가 참하나님인지 시험하자고 제안했다.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왕상18:24)

바알의 선지자들이 먼저 바아르이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응답이 없자 칼과 창으로 몸을 상하게까지 하면서 발악을 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엘리야는 제단을 먼저 수축하고 나서 번제물과 나무 위에 물을 세번 부었다. 모두 열 두 통이나 되는 물이었다(왕상18:32-34). 마른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불이 내려와 타는 것도 기적인데, 엘리야는 물을 흠뻑 젖은 번제물과 나무 위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 타기를 기도한 것이다. 그런데 곧 기적이 일어났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량의 물을 핧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왕상18:38-40).

구약에서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기도해 해를 멈추고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해 아하스의 일영표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10도 물리게 한 기적들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므르라 달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10:12-13).

또 이사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실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로 왕에게 한 징조가 임하리이다 해 그림자가 십 도를 나아 갈것이니이까 혹 십도를 나아가기는 쉬우니 그리할 것이 아니라 십도가 물러갈 것이니이다 선지자 이사여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일영표 위에 나악/tejs 해 그림자로 십 도를 물러가게 하셨더라”(왕하20:9-11)

신약성경에도 능력 행함의 은사에 대한 예들이 많이 있다. 사도행전에는 사도들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을 총해서도 능력 핼함의 은사가 나타났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2:43).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을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5:12)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14:3)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6:8)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8:6).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8:13)

이처럼 스데반과 빌립을 통해서도 능력 행함의 은사, 기적의 은사가 많이 나타났다.

사도행전 9장에 과부들에게 많은 선행과 구제를 행한 욥바의 여제자 다비다 혹은 드로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도르가는 병에 들었고, 사람들이 그 세체를 씻어 다락에 안치했다.(9:36-37). 마침 베드로가 욥바에서 가까운 곳 룻다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제자들은 사람들을 보내 그를 초청해 왔다. 베즈로는 그곳에서 죽은 도르가를 기도로 살려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끓고 기도하고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사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은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9:40-42).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선교 여행을 떠났다. 그들은 배를 타고 구브로에 가서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하루는 총독을 찾아가서 전도하는데, 유대인이자 마술을 행하는 바예수라 하는 자가 이를 방해했다. 바울은 성령이 충만하여 이렇게 말했다.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겎느냐 보라 이제 두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13:10-11).

그러자 바예수는 즉시 볼 수 없개 되어 인도할 사람을 찾으려고 허둥댔다. 사기오 바울은 그 모습을 보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었다. 바울이 행한 이러한 이적은 성령이 성도을 통하여 나타내시는 능력 행함의 은사이다.

          하나님의 표적의 은사들을 주시는 자장 중요한 이유는 표적을 통해 사람들이 마음을 역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를 일으켜 걷고 뒤게 하자, 이를 보고 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스데반과 빌립이 행한 표적들 역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했다. 그리고 베드로가 죽은 욥바의 여제자 도르가를 살려내자 이를 들은 온 욥바 사람들이 주를 믿었다.

능력 행함의 은사로서 나타나는 표적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이 성도들을 위하여 일하고 계심을 보여 주는 수단이기도 하다. 도날드 지(Donald Gee)는 이적의 은사들은 전도자의 복음 전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했다. 곧 이런 ㄱ;적들을 통해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c. 언어적 은사들(Linguistic gifts)

언어적 은사들에는 에언의 은사와 방언의 은사 그리고 방언 통역의 은사가 포함된다. 이 범주에 속하는 은사들은 다 언어와 관련이 있고, 그래서 언어적 은사들로 구분 할 수 잇다.

예언, ‘예언자혹은 선지자를 듯하는 영어 프라펫’(prophet)은 헬라어 프로페테스’(prophetes)의 음역이다. 이 말은 전에’, ‘앞에’, ‘대신하여들의 뜻을 프로’(pro)라는 단어와 선포하다’, ‘말하다등의 듯을 가진 폐미’(phemi)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프로페테스는 예측하는 자’, ‘앞의 일을 말하는 자혹은 대신하여 말하는 자를 의미할 수 있다.

예언자 혹은 선지자 직분은 구약시대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뜻은 구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언자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나비’(nabi), ‘발표하다’, ‘증언하다’, ‘증인이 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선지자 직분을 잘 정의하고 있는 구절들을 구약성경에서 찾으면 다음과 같다.

          내가 그들의 형제 둥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18: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ㅔㄱ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그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보내게 할지니라”(7:1-2).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1:9).

이 구절들에 의하면, 예언자는 하나님이 말씀을 그 입에 두시어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들에게 말하는 자이다. 때때로 예언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들에게 그들의 있을 일들 혹은 장래에 있을 일들에 대해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예언자가 될 수 있는가? 아무나 스스로 내가 선지자 혹은 예언자이다라고 나설 수 없기 때문에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하다. 예언자의 자격에 대해서는 주로 신명기 13장과 18장에 잘 기술되어 있다. 이 말씀을 토대로 예언자의 자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선지자는 기적과 기사를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다(13:1).

(2)  그러나 이적과 이사가 선지가가 말한 대로 이뤄지더라도, 하나님의 율법에 모순되는 말을 하면 그 말은 따르면 안 된다(13:1-3). 곧 선지자는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에 따라 검증을 받아야 한다. 예를 들면, 선지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면서 여호와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고자 한다면 그를 거짖 선지자로 여기고 다르지 말라는 것이다.

(3)  선지자는 형제들 중에서 택한 자이다(18:18).

(4)  선지자는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을 그 입에 두어 주의 이름으로 형제들에게 말하는 자이다(18:19).

(5)  만일 선지자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미래에 대해 예언했을 때 증험도, 성취함도 없으면 그를 배척해야 한다(18:20-22). 즉 선지자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 한 것()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거짖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 거짖 예언들로 백성들을 속이고 미혹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거짖 선지자들을 엄단하셧다.

유다 왕 시드기야 시대에 하나냐라는 선지자가 있었다. 그는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 앞에서 예레미아 선지자에게 거짖 예언을 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여 가라사대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꺽었느니라 내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이곳에서 바벨론으로 옮겨 간 여호와의 집 모든 기구를 두 해가 차기 전에 다시 이곳으로 가져 오게 하겠고 내가 또 유다 왕 여호와김의 아들 여고니아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꺽을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셧다 하는지라”(28:2-4).

그러나 그의 예언이 거짖인 것을 안 예레미아는 나와 너 이전 선지자들이 자고로 여러 나라와 큰 국가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는 진실로 여호와의 보내신 선지자로 알게 되리라”(28:8-9)고 말하고 자기 길을 갔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아에게 하나냐에게 가서 메시지를 전하라고 명령하셨다. 그 메시지는 거짖 예언을 한 하나냐를 엄중하게 심판하시겠다는 것이었다. 거짖 선지가 하나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결국 죽고 말았다.

 

선지자 예레미아가 선지자 하나냐에게 이르데 하나냐여 들으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으로 거짖을 믿게 하는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니 네가 여호와께 패역하는 말을 하였음이라 금년에 죽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니 선지자 하나냐가 그해 칠 월에 죽었더라”(28:15-17).

신약시대에는 두 종류의 선지자가 있었다. 하나는 선지자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었고(4:11), 다른 하나는 교회 안에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전자는 직임 은사들중에 하나이고, 후자는 지금 다루고 있는 표적 은사들중 하나이다. 직임으로서의 선지자는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특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표적 은사들 중 하나인 예언의 은사를 다른 은사들보다 더 사모하라고 권면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14:1)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14:39).

바울은 예언의 은사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던지, 고린도전서 12장 사이에서 예언이라는 말을 총 20회 사용했다.

그러면 예언의 은사는 무엇인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143절에서 이를 안위하는 것이요”(고전14:3).

여기에서 바울은 예언의 은사가 미래의 일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지 않았다. 그것은 선지자가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래에 일어날 들에 대하여 말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이러한 예언을 성경에 기록된 예언과 동등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 예언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분별하고 판단하여야 한다. 고린도전서 14 29절에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 사람이 예언의 은사를 사용해야 할 때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임해 그로 하여금 교회의 지체들에게 말하게 하신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사전에 생각하고 고안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즉각적으로 할 말을 공급하여 주시는 것이다. 이로 인해 교회의 지체들은 권면을 받고, 안위함을 얻으며, 결국 교회의 덕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예언의 은사는 그 목적이 덕을 세우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은사를 통해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더 성숙하게 세워져 간다는 점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신구약 성경이 완성된 이후 예언의 은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뜻을 온전히 깨닫고 이를 전함으로 이를 듣는 이들이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도록 이쓸어 주는 성격을 가진다. 성경 말씀이 모두 예언의 말씀이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듯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1:21).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딥후3:16).

각종 방언, “각종 방언 말함”(고전 12:!0)의 원어는 게네 글로손’(gene glosson)인데, 이는 각종 방언들이라는 뜻으로, 복수형이다. 이는 방언이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암시 한다. 성경에는 새 방언”(16:17)에 대한 ㅇ런급이 있고,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고전13:1) 이란 표현도 있다. 그리고 오순절 날 120명의 제자들이 말했던 다른 방언”(2:4)도 있다.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14:2)고 말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방언에는 세가지 특징이 있다. 챳째, 방언은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는 기도의 말이고, 둘째,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물론 이를 듣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며, 셋째,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 그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아뢰는 것이다.

바울은 방언은 자기 덕을 세우고,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 말했다(고전 14:4). 이는 방언의 은사의 은사를 두고 유익이 없기 때문에 사용할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아무 유익도 없는 방언 대신 교회에 유익을 주는 예언이나 가르침의 은사들을 구하라고 권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바울의 말 중에서 일부분만 택해 왜곡되게 해석한 것으로, 성경의 말씀과 상치 된다.

그러면 바울이 이 부분에서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상세하게 살펴보자.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고전 14:5-6).

바울은 방언이 무익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방언이 성도 자신들의 을 세운다고 말했다. 성도들이 방언으로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때 영적인 면들이 계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바울은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8)고 말해 자신에게도 방언의 유익이 있음을 강조했다. 또한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고 단언 했다. 즉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것이 무익하다고 말하거나 금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바울은 더 나아가서 방언은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전 14:14).

여기서 바울은 나의 용나의 마음을 대조하고 있는데, 이는 바울 자신의 을 말하는 것이다. 즉 그의 영은 하나님께 직접 말하고, 무엇을 위해 기도할 것이가에 대해서도 그의 마음이그의 영보다 앞서지 못한다는 뜻이다. 바울은 방언의 은사로서 이런 종류의 기도는 우리의 영이 하나님께 직접 말하는 영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활동이고, 따라서 우리 마음의 영역을 뛰어넘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다.

바울은 영으로 기도할 뿐 아니라 영으로 찬미하는 것도 장려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14:15).

 

방언은 영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찬송하게 한다. 이성으로 깨달아 아는 말로 기도하고 찬미하고, 또 그뜻을 알지 못해도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방언으로 기도하고 또 찬미한다면 우리의 기도와 찬송 생활에 있어서 폭이 넓어지고, 더 깊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고전 14:22)이 되기도 한다. 이 말의 해석은 바로 다음 절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 14:23).

 

이는 공예배에서 성도들이 다 방언을 말한다면, 성경에 무지한 사람들 혹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고 미쳤다고 비판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만일 공예배에서 방언을 말하려면 반드시 질서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극단적인 은사주의자들의 행위를 경계하고 배격하는 것이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14:27-28).

 

바울은 분명하게 공예배에서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주위에 있는 성도들을 의식해야 하고,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활홍경에 빠질 것이 아니라 절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공예배에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주위에 있는 성도들을 인식해야 하고, 순서대로 말해야 하며,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의 수도 둘 혹은 셋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하였다.

이는 교회에서는 방언 기도를 하면 안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 알지도 못하는 말을 회중을 향해 하는 것은 유익이 없을 뿐 아니라 폐단을 초래할 것이므로 방언으로 기도하려면 자기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하라는 것이다.

          바울은 개인의 덕보다는 교회의 덕을 강조하고 있다. 교회의 덕을 위해서는 방언도 말하고,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통역이 있는 방언은 역시 예언처럼 교회의 덕으 ㄹ세우는 것이라고 마ㄹ했다.

 

방언들 통역.동역은 원어로c ‘허메네니아’(hermenecia)인데, 여기에서 해석학을 뜻하는 영단어 헤르메노이틱스’(herimeneutics)가 나왔다. 이 단어는 동사로 여러 차례 신약성경에 사용되었지만, 명사로서는 단지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에서만 성령의 은사와 관련해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번역혹은 설명이라는 쯧을 갖고 있다. 따라서 방언들 통역은 공예배에서 방언을 자구적으로 번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의미의 설명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옳은 해석이다. 그러므로 방언들 통역에 있어서 방언과 이를 통역하는 말의 길이가 똑같을 팔요는 없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방언들 통역은 예언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은사이다. 그렇기 대문에 바울은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고전14:13)라고 권했다.

 

1)   직임 은사들(Ministry gifts)

직임 은사들에는 크게 사도, 선지자, 전도자, 목사, 교사, 등 다섯가지가 있다.

 

사도. 신약성경에서 사도를 뜻하는 단어는 아포스톨로스’(Apostolos), Theological Dictionary of New Tastament(신약 신학 사전)는 이 단어가 항상 전권과 함께 파송받은 자’, ‘사람을 법적으로 대표하는 자’, 한 회중으로부터 위임된 대표’, 신약의 메세지를 전하는 자’, 예수님 자신’(3:1)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말한다.

          신약성경에서 사도직은 원래 열두 제자들로부터 시작 되었다(21:14). 그러나 그 후 열두 사도들 이외에 맛디아(1:26), 바울(1:1), 바나바(14:14), 디모데와 실라(살전2:7)가 추가 되었다.

          은사로서의 사도는 교회 안에서 최초로 제정된 직임으로, 협의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부르신 열두 제자들과 바울이 포함된다. 그러나 광의적으로 그리고 신약적인 개념으로 보면 현대 선교사들이 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아 사도의 직임을 일부분 감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도. 신약성경에서 사도를 뜻하는 단어는 아포스톨로스’(Apostolos), Theological Dictionary of New Tastament(신약 신학 사전)는 이 단어가 항상 전권과 함께 파송받은 자’, ‘사람을 법적으로 대표하는 자’, 한 회중으로부터 위임된 대표’, 신약의 메세지를 전하는 자’, 예수님 자신’(3:1)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말한다.

          신약성경에서 사도직은 원래 열두 제자들로부터 시작 되었다(21:14). 그러나 그 후 열두 사도들 이외에 맛디아(1:26), 바울(1:1), 바나바(14:14), 디모데와 실라(살전2:7)가 추가 되었다.

          은사로서의 사도는 교회 안에서 최초로 제정된 직임으로, 협의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부르신 열두 제자들과 바울이 포함된다. 그러나 광의적으로 그리고 신약적인 개념으로 보면 현대 선교사들이 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아 사도의 직임을 일부분 감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선지자. 은사로서의 선지자는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에 나오는 예언과 구분되는 직임 은사이다. 예언의 은사는 성령이 필요로 하시는 때에만 잠정적으로 사용되지만, 직임으로서의 ㅅㄴ지자 은사는 항존직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잇다.

          직임자로서 선지자는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calling)이 필요하고, 교회로부터 위임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해야 하는 은사이다. 선지자는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할 때 꼿 미래에 일어날 일들만 전하지 않고, 때때로 과거를 통해 말씀을 전하기도 하며, 현재의 일들을 다루기도 한다. 물론 이미 살펴본 것처럼 구약시대에 선지자들이 있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위기를 만날 때마다 그들을 일으켜 세우셨다. 그들이 이스라엘에 전한 메시지는 경고와 심판이 있는가 하면, 권면이나 위로도 있었다.

          신약시대의 선지자는 구약시대의 선지자들과 성격상 큰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을 계승했다. 둘 다 하나님을 대신해 말했고, 죄에 대한 심판을 경고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메시지를 받았다. 그리고 둘 다 미래의 일들에 대해 예언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일들도 다뤘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국가적 지도자들이요 개혁자들이며 애국자들이었고, 거의 이스라엘 공동체를 중심으로 예언했지만 신약의 선지자들은 성격과 메시지 면에서 모두 개인적이었다.

 

전도자. 직임으로서 전도자의 은사는 한곳에서 같은 회중을 섬기며 목회를 하기보다는 평생 광범위한 곳들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성도는 복음 전도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전도자 직임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빚진자의 심령이 강하고, 전도의 능력과 결실이 탁월해 이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나오게 된다.

 

목사. 직임으로서 목사의 은사는 특별하다. 원래 목사는 목자의 의미를 갖고 있다. 목자는 양을 먹이고 돌보며 보호하는 책임을 갖고 있다. 따라서 목사는 성도들의 영혼을 영적 양식인 말씀으로 먹이고, 그들의 영적 관심사를 돌보며, 혹 이단 사설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보호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 목자는 또한 양들을 사랑해야 한다. 아흔아홉의 양들을 놔둔 채 잃은 양 하나를 끝까지 찾는 영혼 사랑의 자세가 기본이다. 이런 기본적인 자세가 없으면 한낱 삯꾼에 지나지 않는다.

          목자는 항상 양들 앞에 서서 무리를 인도한다. 마찬가지로 목사도 언행 면에서 성도들의 모범이 되어야 하고, 그들을 진리의 길로 인도해야 한다.

 

교사. 에베소서 4 11절에 나오는 다른 직임 은사들에는 다투스’(tous) 어떤 사람이라는 관사가 붙었는데, 유독 교사의 은사에만 빠졌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목사와 교사의 은사가 별개가 아니라 병합된 은사의 하나라고 말한다. 사실 목사는 가르치기를 잘하는 자여야 한다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했다(딤전3:2). 그리고 목양에 있어서는 설교뿐만 아니라 잘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다. 예수님도 그분의 공생애에 있어서 가르치는 일에 상당 부분을 할애하셧다. 바울 또한 잘 가르친 훌륭한 교사였다.

          그러나 오마서12 6-8절에 나오는 가르침의 은사는 직임으로서 목사, 교사와는 다르다. 우리 주위에는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지 않았어도 순전한 마음으로 잘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목사도 선지자도 아닌 평신도들이었지만,당대의 성경 교사 아볼로를 자기 집에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가르쳤다(18:26).

 

1)   봉사 은사들(Serving gifts)

봉사 은사들은 크게 섬김, 권위, 구제, 다스림, 긍휼, 돕는 덕,손 대접, 독신 등 여덟가지가 있다.

 

          섬김. 섬김에 해당하는 원어는 디아코니아(diakonia),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은사들을 말할 때 사용했던 단어이다.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고전12:5).

 

이는 모든 은사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는 수단임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그리고 디아코니아에서 나온 디어코누스’(diakonous)는 신약성경에서 집사를 의미한다. 원래 디아코누스혹은 식탁에서 시중드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후에 초대교회에서는 선기는 자혹은 봉사하는 자의 의미로 발전했다. 그리고 사도행전 6장에서 최초로 집사라는 말이 사용되었고, 후에 바울의 목회 서신들에서 초대교회 직분들 중 하나가 되었다(딤전3:8, 10 12-12).

          그러므로 섬김의 은사는 마치 종처럼, 식탁에서 시중드는 사람처럼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들을 섬기기 위한 것이다. 교회 안에 섬김의 은사가 이쓴ㄴ 사람들이 많으면 누가 더 크냐?’하는 생각으로 야기되는 다춤과 분쟁은 자연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권위. 권위는 원어로 파라클레시아’(paraklesis), 보혜사를 뜻하는 파라클레토스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곧 성령이 하시는 일들 중 하나인 위로격려를 의미한다. 사도행전에서 바나바는 권위자로 불렀다(4:36).

          특별히 권위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해 힘을 얻게 하고 일어서게 만든다. 하나님은 마게도냐에서 환난을 당해 어려움에 처한 바울의 일행에게 디도를 보내서 위로하셧다(고후7:6). 또한 바울은 두기고를 골로새 교회에 보내 그들의 마음을 위로했다.(살전3:2).

 

구제(기부). 원어 성경의 호 메타디두스’(ho metadidous)를 한글판 성경은 구제 하는 자로 번역 했지만, 원래의 뜻은 기부자에 더 가깝다. 같은 단어가 세례 요한의 가르침에도 나타난다.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3:11).

 

여기서 메타도토’(metadoto)나누어 주다로 번역되었다. 이는 자신의 재산이나 소유물을 나누는 행위를 뜻한다. 옷 두 벌 있는 사람은 한 벌을 옷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이 충분한 사람은 없는 사람과 나누라는 말이다.

          교회 안에서 구제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다시들의 물질을 아기지 않고 써서 그들의 필요한 것들을 채운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이 바친 물질로 구제해 믿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욥바의 여제자 다비디는 구제를 많이 행한 사람이었고(9:36), 백부장 고넬료는 구제를 많이 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으며, 하나님이 기억하셧다고 기록되어 잇다(10:2, 4, 31).

 

다스림. 이 은사는 로마서 12 8절과 고린도전서 12 28절 두 곳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두 곳에 사용된 헬라어는 다르다. 전자는 지도력과 관련된 은사이고, 후자는 항해사의 의미를 가졌다.

          지도력과 관련된 다스림의 은사는 교회와 성도들이 바로 세워지도록 이쓸어 나가는 능력을 말한다. 교회는 여러 층의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따라서 교회가 잡음 없이 평화롭게 주의 뜻을 성취해 나가기 위해서는 이런 지도력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한편 항해사의 뜻을 가진 다스림의 은사는 지도력을 의미하는 다스림의 은사와 약간 다르다. 이는 행정력에 가깝다.

 

배 안에서 항해사는 지도자이지만 선장은 아니다. 그러나 선장이 배를 목적지까지 잘 이끌고 가려면 항해사의 도움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이 두가지 다스림의 은사들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이 두 가지 다스림의 은사들이 필요하다. 주 안에서 큰 그림을 그리고 교회와 성도들을 인도하는 리더도 필요하고, 그 리더에 맞춰 관리자로서 세세한 부분들에 책임을 지고 임무들을 수행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도 필요하다.

 

긍훌. 긍휼을 베푸는 자를 뜻하는 헬라어는 엘레에오’(eleeo), 이는 원래 자비를 보이는 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인간이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오마서 128절에서만 사용되었고, 다른 곳들은 모두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사는 것에 대한 기록들이다(9:15-16, 18; 11:30-32: 고전 7:25: 고후 4:1; 2:27; 딤전1:13, 16).

        긍휼 혹은 자비의 은사는 과부와 고아와 약한 자와 병든 자를 돌보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 안에 이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많으면 교회는 사회를 위해 더 큰 일들을 할 수 있고, 공헌 할 수 잇다. 그리고 이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이 일들을 억지로나 의무적으로 하지 않고 즐거움으로 한다.

 

돕는 것. 어떤 신학자들은 돕는 것의 은사를 긍휼의 은사와 동등하게 취급한다. 그러나 돕는 것의 은사는 성격상 독특한 것이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안틸렘프세이스’(antilempseis), 바울은 아마도 사도들을 도왔던 집사들을 염두에 둔 것 같다. 따라서 돕는 것의 은사는 봉사 은사들의 범주보다는 직임 은사들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돕는 것의 은사를 지닌 사람의 대표적인 예로 바나바를 들 수 있다. 그는 안디옥 교회를 세웠고, 그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했다. 바나바는 계속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로 남을 수 있지만, 바울을 청빙해 대신 그 자리에 세우고 자신은 바울을 돕는 자리로 내려갔다. 서로 큰 교회 담임 목사가 되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인 것을 볼 때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였다.

          돕는 것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바나바처럼 자신이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없다. 단지 주님 편에서 그리고 교회 편에서 어떤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더 유익할까를 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보다 교회에 더 유익이 되는 사람이 발견되면 기쁨으로 2인자의 자리로 내려가 그 지도자를 최선을 다해, 겸손하게 돕는다. 이런 은사를 가진 성도들은 교회에서 윤활유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손대접. 손 대접의 헬라어는 릴록세이안’(philokseian)으로, 문자적으로는 손님을 좋아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구약시대부터 유대인들은 손 대접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들 중에 하나로 여겨 왔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을 염두에 두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13:2)고 말했다.

          교회에 이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많으면 그 교회에는 손님들이 그치지 않는다. 그리고 손님들은 자신들이 마치 예수님처럼 대접을 받았다고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손 대접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손님들을 마치 예수님처럼 여기고 대접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교회가 지금도 존재한다. 김남수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프라미스 교회는 수차례 전 세계적으로 세계 선교 지도자들을 추청해 ‘4-14 윈도우 콘퍼런스를 개푀했다. 2014 10월에는 아프리카, 남미, 중국, 일본, 유럽, 호주, 유질랜드 증지에서 1천명 이상의 세계 선교 지도자들이 모였는데, 78일 동안 성도들이 휴가를 내어 공항 영접부터 하루 세끼 식사 제공과 호텔 숙박까지 예수님을 모시듯 대접했다. 흥미로운 것은 ‘4-14윈도우콘퍼런스가 해를 거듭할수록 그 규모가 더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하나님이 이 선교 전략을 기뻐하시고 도우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 대접의 은사를 받은 목사와 성도들의 헌신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서로 손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벧전4:9)

 

독신. 바울은 고린도전서 77절에서 독신을 하나의 영적 은사로 언급했다. 그는 성도들의 결혼 생활에 개해 말하면서,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고 말했다.

바울은 분명히 이 말이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고전7:6)고 선을 그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대로 결혼을 하든지 혹은 자신처럼 독신으로 살든지 하라는 것이다. 이 말은 독신의 은사 없이는 절대 혼자 살 수 없고, 그럴 경우 절제하지 못해 사탄의 시험거리가 된다는 뜻이다.

          사실 독신으로 주와 교회를 섬기면 많은 이점들이 있다. 가족을 볼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주님과 교회에 쓸 수 있다.  그리고 더 자유로운 몸으로 방방곡곡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 가족 부양의 부담이 없기 때문에 돈 문제에 덜 얽매이게 된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바울은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성려의 은사를 받지 않고 독신으로 주님과 교회를 성기는 것은 본인은 물론 주위 사람들도 힘들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까지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성령의 은사들은 성령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 그분의 뜻대로 나누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고전 12:11),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자랑할 것도 없고, 또한 교만해서도 안 된다. 받은 성령의 은사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교회의 유익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겸손한 자세로 사용해야 한다.

 

7   신유

성령 충만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 중심적이 되는 것이다.” – 존 맥아더

 

지난 반세기 동안 기독교 내에 신유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므게 증가되었다. 신유는 분명히 성경적, 역사적 근거를 갖고 있음에도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

          한편에서는 신유가 성경적이라고 믿고 이를 행사하고 있는 반면에, 다른 편에서는 신유를 인간이 만든 운동심지어는 모조된 기적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면 신유의 어떤 면이 이처럼 교회를 갈라놓는 것일까? 몰턴 켈시(Morton Kelsey)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 간에 이 주제에 대해 견해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견해차 이상의 것이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 성례적 혹은 종교적 신유의 가치에 대한 차이는 단지 하나님이 인간의 삶 속에서 어떻게 일하시는가에 대한 그리스도인들 간의 근본적인 분열의 한 증상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각 신앙 공동체가 가지고 잇는 신학적 편견이 이런 견해차와 분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신유에 대한 기독교 내의 일반적인 견해들은 무엇인가? 이는 크게 세 부류로 구분 할 수 있다.

 

1.   신유에 대한 현대 교회의 견해

1)   정통 기독교적 견해

주류 교회들은 사도 시대 혹은 계시 만료 이후로 신유를 포함한 모든 기적들이 다 소멸되었다고 한다. 특별히 신학자 벤자민 위필드(Benjamin B. Warfield)는 은사나 기적은 하나님의 기적의 시대들과 관련되어 몇 가지 봉우리들을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 즉 풀애굽기나 시내 산에서의 율법 전수는 초기 계시 시대의 한 봉우리요,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는 다른 봉우리이며, 예수와 사도들의 시대는 계시의 시대에 있어서 마지막 봉우리라는 것이다.

벤자민 위필드는 또한, 매 시대마다 소위 기적적인 은사들은 새로운 계시에 대한 신적 신빙성을 보여해 주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졌다고 말한다.

 

 

 

그래서 계시가 하나님의 아들과 말씀을 통해 종료된 후로 이런 은사들과 기적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존 맥아더(John Macthur)도 예언, 방언, 빙언 통역, 능력 행함, 신유 같은 표적의 은사들은 특별한 목적이 있었고, 이는 사도들에게 심임장과 같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즉 사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것을 입증해 주기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존 맥아더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으로 문서화된 지금은 표적으로서의 은사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결국 이런 은사들은 종료되었다고 말했다.

 

2) 자유주의적 견해

 

자유주의자들은 정통 기독교 견해와 달리 성경에 기록된 기적과 신유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 나타나고 있는 신유를 포함한 기적들뿐만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을 과학과 이성의 눈으로 비평한다.

특별히 루돌프 볼트만(Rudolf Bultmann) '비 신화화'라는 설을 체계화 했다. 이는 성경 안에 나오는 모든 기적들은 당시 사람들의 지적 수준이나과학적 지식으로는 이해가 갈지 못라도, 현대인들에게는 신화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내용들을 모두 비신화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이 견해에 따르면, 신유를 포함한 모든 기적들은 있을 수도 없고, 또 잇다고 가정하더라도 입증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3) 신유는 계속되고 있다는 견해

조지 말론(George mallone) '신종교개혁'으로 불렀던 '카리스마주의' 혹은 '은사주의'는 정통 기독교적 견해와 자유주의적 견해 양쪽을 다 비판한다. 특별히 은사주의는 초교파적으로 확산되어 장로교단, 감리교단, 루터교단 등에서도 이 견해를 따르는 신학자들과 교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이들은 신유를 포함한 모든 은사들과 기적들이 현재에도 나타날 수 있고, 그리스도인 누구나 행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정통 기독교적 ㄱ션해처럼, 모든 기적이 사도 시대 이후로 종료되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신유를 비롯한 은사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주장은 고린도전서 138-10절에 근거하고 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8-10)

그들은 이 구절에서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성경이 완성되는  때라고 해석한다. 따라서 성경이 완성되면 예언도 방언도 다 폐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예언과 방언뿐만 아니라 지식도 폐해져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지식이 폐해진다는 말을 쏙 빼놓고, 단지 예언과 방언 같은 표적의 은사들만 성경 완성 후 종료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자기 모순에 빠지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반면에 은사주의 견해는 교회사를 통해 신유를 포함한 기적들이 계속 나타났고, 현대 교회 안에도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를 성경적, 역사적, 실제적으로 증명하려고 한다.

 

 2. 신유의 성경적 증거

바울은 성령의 은사들을 다루면서 '병 고치는 은사'가 그중의 하나라고 말했다(고전12:9). 병 고치는 은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카리쇼ㅡ마타 야마톤'(charismata iamaton)으로, 두 단어 모두 복수 명사로 사용되었다. 직역하면 '신유의 은사들'(gifts of jealing)이 된다. 이는 질명의 종류가 다약하고 또한 치료 방법도 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야고보 역시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5:15).

 

1) 구약에서의 신유

구약에는 '신유'에 해당하는 많은 단어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a. 라파

'라파'(rapa)는 크게 '사물', '사람 혹은 하나님', 몸 혹은 영혼'에 대해 사용되는데, 각각 쓰이는 용도가 다르다.

사물에 대해 사용될 때 '라파' '원상대로 복구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엘리야가 길멜 산에서 단을 '수축' 할 때(왕상18:30)와 한번 깾;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없는 토기장이의 그릇(9:19:11)을 말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사람 혹은 하나님께 개해 사용될 때 '라파', 사람에게는 '의사'(50:2), 하나님께는 '치료자'로 사용되었다(15:26). 특별히 '여호와 라파'라는 명칭은 하나님이 인간의 건강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계시는가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 단어는 몸 혹은 영혼의 치료를 의미하기도 했다.하나님은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해 자녀들을 갖게 하셨다(20:17). 또 다른 곳에도 육신적인 치료에 대한 언급들이 있다.(21:19; 왕하 8:29; 9:15; 삼상 6:3; 28:27). 그리고 메시아의 고난을 예언한 이사야 53 5절도 육신적 치료를 언급하고 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ㅈ히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53:5).

 

다윗은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고백적인 표현으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 - -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103:1-3)라고 노래했다. 시편 기자는 영혼의 치료에 대해서도 기도했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 앞에 범했기 때문이다(41:4). 이 밖에도 성경에는 '하나님은 상심한 자를 고치시는 분'( 147:3), '하나님은 아스라엘의 패역을 고치시는 분'( 14:40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b. 아루카

아루카(aruka)는 문자적으로 '연장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곧 하나님의 치료는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것이고은혜라는 의미이다.( 58:8; 8:22; 30:17).

 

2) 신약에서의 신유

신약에서의 신유의 의미로 사용된 단어는 '테라퓨오'(therapeuo), '야오마이'(iaomai), '소조'(sozo)가 있다.

 

 a. 테라퓨오

이 단어는 거의 육신의 치료에만 사용되었다( 4:23; 4:23; 5:10; 4:14; 5:16; 8:7; 12:3, 12).

 

 b. 아오마이

이 단어는 육신적인 치료의 의미로 22회 사용되었고( 15:28; 9:34 ), 상징적으로 영혼의 치료를 의미하기도 한다( 13:15; 12:40; 28:27,; 12:13; 벧전 2:24). 야고보서 5 16절은 육신적 치료와 영혼의 치료 둘 다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야오마이'는 구약의 '라파'와 가장 근접한 동의어라 할 수 있다.

 

 c. 소조

일반적으로 '구원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인 '소조'는 때로는 '치료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5:23; 8:6). 그러나 이 단어는 거의 육신의 치유 이상의 의미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나( 9:21-22), 열 번째 나병 환자( 17:19),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나면서 못 걷게 된 이( 4:9) 등은 육신적 치료 이상의 영적 축복도 받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와같이 신구약 성경에 사용된 용어들을 살펴보면 몇 가지중요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으니간의 육신적 치료에 큰 관심을 갖고 계시고, 둘째, 하나님의 치료는 '전인적 치료' 곧 육신과 영혼을 포함하며, 셋째, 신유는 구원의 일부라는 것이다.

 

 3. 신유의 역사적 근거

 

 초대교회 100년 동안에는 표적과 기사가 현저하게나타나 당시 그리스도인들 삶에 생동감을 주었다. 그때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구전으로 떠도는 말이 있었다. '만일 너희가 아픈 형제를 보고 그를 치료해 주지 않는다면, 그의 피가 네게 호소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초대교회 안에서 신유 같은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이러한 당시 복음 전파의 아주 중요한 한 요소로 작용했다.

그러면 초대교회 이후는 어떠했는다? 신유의 은사가 어떤 사람들이 중장하고 있는 것처럼 사도들만의 전유물이고, 그 이후에는 종료돤 것인가? 아니다. 교회사의 증거들은 이에 대해 분명하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교회사의 증거들을 세대적으로 구분해 살펴보자.

 

 1) 속사도 시대부터 콘스탄티누스 대제까지(AD 100-313)

사도 시대 이후에도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믾았다. 이는 신유를 포함한 기적들이 사도들과 함께 끝나지 않았다는 가장 근본적인 증거들이다. 예를 들어 유스티노스(Justinus) 2세기 중반에 쓴 글에서,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과 예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침받은 사람에 대해 언급했다.

이레니우스(Irenaeus)도 그의 책 Against Heresies(이단에 반하여)에서 신유의 은사를 행하는 것으로 참 기독교 교사와 가짜를 가려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언급한 득별한 치료들에는 맹인이 시력을 되찾은 것, 듣지 못하는 자가 청력을 되찾은 것, 약한 자의 치료, 못 걷게 된 자와 중풍병자의 치료 그리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포함되었다. 더욱이 그는 이런 능력들을 이방인들 앞에서 행할 때 비신자들조타도 치료를 받고 가끔 개종하는 일들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도 처음에는 신유를 부정했지만, 후에 City of God(하나님의 도성)에서 자신의 신유에 대한 견해가 바뀐 것을 증언했다. 그는 자신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기적들이 일어났고, 입증된 것만 해도 약70개가 된다고 말했다.

 

2) 콘스탄티누스 대제부터 종교개혁까지(AD 313-1517)

일반 교회사와 마찬가지로, 이 시대는 영적인 것도 퇴보 했다. 에블린 포로스트(Evelyn Frost)는 그의 책 Christian Healing(기독교적 신유)에서, 이 시대 교회 내 신유의 능력이 사양길로 접어들게 된 몇가지 요인들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첫째로, 콘스탄티누스 개제 이후로 교회의 공적 주체성이 변질되었다. 즉 교회의 문이 활짝 열려 세속화를 받아 들였다. 믿음이 정치적, 과학적으로 잘 포장된 인간의 지성과 교환되었던 것이다.

둘째로, 너무 일찍 다가온 종교와 과학의 분리이다. 이째부터 종교는 과학의 발전에 적이 되었다. 지식의 성장은 전문화를 가져왔는데, 특별히 의사는 신체를 책임지는 전문가로, 성직자는 영혼을 책임지는 전문가로 갈라졌다.

셋째로, 신학적 탈선이다. 야고보서 5장에 기록된 신유의 약속을 단지 영적 치료에 적용되는 것으로 재해석 되었다. 그래서 질병 치유를 위해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는 신유 의식이 신자의 임종 시에 사용되는 의식이 되고 말았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 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언으리라"(5:14-15).

 

3) 종교개혁부터 근대 오순절까지(AD 1517 ~ 20세기 초)

마틴 루터(Martin Luthur)는 원래 신유의 은사를 부정했다. 그러던 1540년 어느날, 동역자 멜란히톤(Melanchthon)이 심각한 병에 걸렸을 때 죽음이 임박한 것을 보고는 무릎을 끓고 그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다. 근 ㄴ벽에 시편 118 17절을 써서 붙혔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라는 말씀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부터 멜란히톤의 병세가 눈에 띄도록 호전되었다. 이 신유 기적에 대해 마틴 루터는 항상 자신이 본 기적들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18세기에 존 웨슬리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진정한 일하심이 막 일어나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미신적이라든가 심지어는 이단자로 간주되는 편이 낫다. - - 초기의 그 기적적인 은사들이 그렇게 갑자기 사라진 것은 믿음이나 거룩함을 거의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그 메마르고 형식적이며 정통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이 갖지 못한 은사는 무엇이든지 조롱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런 것을 광적이라든가 사기라고 부인하기 때문이다.

 

 존 웨슬리를 시작으로 에드워드 어빙(Edward Irving), 드와이트 무디, 찰스 피니(Charles Finney)등으로 이어지는 성령과 은사들을 강조하는 영적 지도자들을 통해 19세기부터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런 영적 흐름은 형대 교회까지 이어져, 이제 신유의 은사를 포함해 기적들을 믿고 행사하는 교회들이 확장되고 있다.

 

4. 신유의 신학

신유에 대한 신학적 토대를 구축한 신학자들과 그들의 책들에는 몰턴 켈시의 Healing and Christianity)(신유와 기독교), 존 베이커(John Baker) Salvation and Wholeness(구원과 완전성), 프란시스 맥넛(Francis MacNutt) Healing(신유) 등이 있다. 이들은 신유를 신학적으로 체계화한 사람들인데, 특별히 '신유의 신학'을 위해 몇가지 신학적 가정들을 세워 놓았다.

첫째, 하나님은 모든 신자들이 그들의 연수가 다 할 때까지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신명기 34 7절에 따르면, 모세는 120세가 되도록 그의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죽은 것은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거두셨기 때문이다. 즉 모세는 그의 연수가 다 할 때까지 건강하게 살았다( 23:26; 42:16-17; 31:15 참조)

둘째, 신유는 구원의 한 부분이다. 존 베이커는 "성경 안에서 죄 사함, 신유, 영생 그리고 악으로부터의구속 등은 절대로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에 같이 포함되는 한 개념들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구원과 신유는 절대적으로 상호교환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신유와 고난의 관계는 어떠한가? 구원의 한 부분으로서의 신유는 신자들의 삶 속에서 고난의 위치를 배제하지 않는다. 고난은 신자의 인격을 다듬어 주고 그리스도를 닮게 한다( 5:3-5).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고난에 대한 잘못된 견해 때문에 질병을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있다. '모든 질병은 하나님이 다 고쳐주신다'고 주장하는 것과 '모든 질병은 고난의 목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생각하는 두가지 견해 모두 극단적이다. 그러므로 질병들이 어떤 이유에서 오는지 사려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셋째, 예수님의 죽음과 대속에는 영적 화목뿐 아니라 육신적 치료도 포함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성경 구절은 이사야 53 4절 이하를 인용한 마태복음 8 17절이다. 이사야 53 4절 상반 절에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질고' '슬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각각 '촐리'(choli) '마콥'(makob)이다.그런데 마태는 '질고' '슬픔'에 대해 각각 '연약한 것'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F. F. 보즈워스(Bosworth)는 마태의 번역이 원래 히브리어가 갖고 있는 실제 의미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구약성경 히브리어 성구 사전을 보면, '촐리' '' 혹은 '아픔'의 의미로 여러곳에서 사용되었고, '마콥' '슬픔' 혹은 '고통'으로 사용되었다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신유가 깊게 연관되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민수기 21 4-9절에 나타난다. 이는 요한복음 3 14-15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대속적 죽음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예수님에 의해 인용되었다.

 

"모세가 관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4-15).

 

불 뱀들에 물려 죽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단 놋 뱀을 쳐다보았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순종한 죄를 용서받았을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치료도 받았다.

육체의 치료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하기 때문에 이는 일시적인 구원일 뿐이다. 이보다 더 큰 육체적 구원은 부활과 함께 변화된 몸이 되어 더 이상 아픔도, 질병도 없게 되는 긍극적인 구원이다(고전 5:5; 3:20).

 

5. 질병의 종류와 원인

 

신유의 은사를 행함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극히 제한된 것들을 거의 모든 상황들에 적용시키려 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지극히 위함할 뿐 아니라 비효과적이고, 심각한 폐단을 초라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프랜시스 맥넛은 질병

종류는 크게 네가지가 있고, 그에 따라 각각 원인과 치료 방법이 다르다고 말했다.

그러나 프랜시스 맥넛의 분류를 보다 성경적인 용어들로 성명하자면, 질병의 종류와 원인은 다음과 같다

 

질병의 종류 및 원인과 치료 방법

질병의 종류 원인 영적 치료 의학적 치료
영혼의 병 자범죄 회개 없음
감정적 병 원죄,                 과거의 상처 내적 치유의 기억 혹은 잠재의식의 치료 상담심리학,         목회
신체적 병 질병, 사고, 부주의, 스트레스 믿음 안수 의학, ,             예방의학
귀신 들림 귀신 구마 기도 없음

 

 

1) 죄로 인한 병

요한복음 5장에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38년 된 병자를 예수께서 고치신 사건이 나온다.예수님은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5:14)고 하셨다.

야고보서 5 16절에는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2)   정신적 병

심히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으로 입게 된 마음의 상처 때문에 생기는 병이다. 아동기에 경험한 마음의 상처가 잠재의식 속에 있다가 후에 여러 종류의 전신적인 질병들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3)   신체적 병

병원체에 감염되어 발생하는  , 부상으로 인한 병 그리고 스트레스로 인한 병이 있다.

4)   귀신 들림

성경에는 귀신 들린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많다. 귀신은 사람에게 어와 정신이나 육체를 병들게 한다. 귀신은 사람을 미치게도 하고, 군대 귀신 들린 사람처럼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도 한다( 8:26-30).

 

1.   신유의 실제

1)   영혼의 상태와 질병의 관계

회개와 죄 사함은 성경의 핵심 메시지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대속하셨다. 인간에게 가장 급선무는 회개하고 되 사함을 받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해야 한다. 정신과 육체의 병들은 죄와 관련이 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각종 질병중에는 죄에서 온 것들이 있다. 그럴 때 회개와 죄 사함은 신유와 관련이 있다. 이들의 관계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살펴보자.

첫째, 육테적 질병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을 때 나타날 수 있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계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29-32).

 

이 구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약함과 병과 심지어 죽음이 그들의 죄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죄와 병의 관련성에 대한 연구가 교회보다는 의사들이나 심리학자들에 의해 더 많이 행해지고 있다. 이들의 연구에 따르면, 육체적 질병들의 대부분은 감정적 요인들에서 온다고 한다. 예를 들면, 암 같은 병조차도 감정과 깊게 관련된 병이라는 학술 보고가 나왔다. 대부분의 암 환자들이 오랫동안 소망없이 지내다가, 자신들의 삶이 종국적으로 어두울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특별히 위궤양 같은 병도 낙망이나 좌절 같은 단순한 침체 감정에 의해 생긴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네 친구들에 의해 들것에 들려온 중풍병자의 경우는 그의 병이 죄와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예수님이 그를 처음 보시고,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2:5)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곧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 줌으로써 그의 중풍병까지 동시에 치료해 주셧던 것이다( 2:1-12).

둘째, 육체적 질병은 종종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필요로 한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11:25).

 

이로 볼 때 다른 사람의 혐의를 용서하지 않는 것은 신유에 걸림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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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신유를 위해서는 쓴 뿌리를 제거해야 한다. 교회의 화평과 거룩함을 파괴하는 언행을 회개해야 한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12:15).

 

1)   마음에 생긴 상처로 인한 병의 치유

사람의 의식은 현재 의식잠재의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잠재의식이 현재의식보다 정신 건강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현재의식은 잠재의식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구하다. 따라서 우리의 현재의식 속에 있는 죄, 상처, 쓴 뿌리는 회개와 용서를 쉽게 사함을 받거나 제거될 수 있지만, 잠재의식 깊은 곳에 저장되어 있는 있는 죄와 상처와 쓴 뿌리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우리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러한 잠재의식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마쁜 기억들이나 마음의 상처를 제거하고 치유하는 방법에 대해 더 상세하게 살펴보자.

 

a.    주님이 하신다.

주님은 영원하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현재의식뿐만 아니라 과거의 나쁜 기억들과 마음의 상처들을 제거하고 치료해 주실 수 있다.

b.   근원을 찾는 단계가 필요하다.

자신에게 나쁜 영향을 주고 있는 상처들과 쓴 뿌리가 무엇인지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어렸을 때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고 그것이 쓴 뿌리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애그너스 샌포드(Agnes Sanford) The Healing Gifts of the Spirit(성령의 신유 사역)라는 책에서, 이 단계에서는 먼저 사람들에게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래서 아니요라는 대답이 나오면, “무슨 잘못된 일이 있었습니까?”라고 물어, 그 당시 받았던 상처들을 치료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만일 라는 대답이 나오면, “언제 나쁜 일이 처음 일어났습니까?”라고 물어서 그 뿌리를 찾아가는 것이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학교에서 선생님께 받은 상처, 친구들에게 받은 상처, 부모나 친적으로부터 받은 학대, 성적인 추행 들의 쓴 뿌리들이 있다. 그리고 장성해서 배우자로부터 받은 상처, 신앙 공동체로부터 받은 상처들도 마음 깊이 잠재되어 있을 수 있다.

 

c.    용서의 기도가 필요하다.

쓴 뿌리를 찾는 단계에서 과거에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발견되면 그를 용서해 주는 기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아주 나쁜 일이었다먄 그 일을 쉽게 잊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대상이 사람일 경우, 증오와 마음 대신에 성령이 용서와 사랑의 마음으로 채워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2)  신체적 병의 치료를 위한 기도

 

신약 성경 여러 곳에서 귀신 들린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11:14-26; 5:1-14). 귀신 들린 사람을 위한 기도는 사실 사람을 향한 기도가 아니라 귀신에게 하는 기도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귀신들을 쫓는 기도, 곧 구마 혹은 축사의 기도이다. 구마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꾸짖고,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귀신들을 말씀으로 명령해 쫓아내셨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8:16)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쫏아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려보내소서 한대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려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8:31-32).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쫏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17: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17:18).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셧음이라”( 5:8).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구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9:25-26).

 

이는 예수께서 이니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셧음이라”( 8:29).

 

예수님은 자신이 귀신을 쫓아낸 거서럼,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셨다.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10:1)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6:17).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귀신들을 쫓아냈다.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명하여 쫓아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5:16).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8:7).

 

이간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16:18).

 

          그러나 장난삼아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그리고 귀신 들린 사람을 위한 구마 혹은 축사의 기도는 초신자들이나 믿음이 약한 성도들에게는 권장할 일이 아니다.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귀신을 좇아내는 것을 보고 마술을 하는 일부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의 악귀를 주 예수의 이름으로 쫓아내려고 하는 사건이 나온다. 그러나 그때 오히려 악귀 들린 사람이 그 유대인들에게 뛰어올라 제압하므로 그들이 상처를 입고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쳤다( 19:111-16).

 

1)   신유의 은사와 믿음의 은사의 관계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신유에 있어서 믿음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어떤 사람은 신유의 은사를 받아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믿음의 은사로 병을 고친다. 따라서 한 사람이 병 고침을 받았을 때 그것이 신유의 은사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믿음의 은사로 린한 것인지 구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만 은사를 행하는 사람은 이를 알 수 있다.

          믿음으로 기도했다고 해서 다 났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열번 믿음으로 기도해서 두 세 차례 병자들이 고침을 받는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단 한 사람이라도 병 고침 받을 수 있다면 믿음으로 기도하는  일이 그쳐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도를 통한 신유를 무시하고 무조건 약이나 의학에만 의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약이나 의료 기술도 치료하는 하나님이 주는 은총이다. 결국 병을 고치시는 이는 하나님이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계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함심을 얻으리라”( 5:15).

 

사람은 믿음의 기도를 하고, 병든 자를 일으키는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사람이 할 일을 하면 하나님은 당신이 하실 일을 당신의 주권으로 행하신다.

 

 

4부 왜 성령인가?

 

8성령의 열매

 

성령의 은사들이 평생 주어지는 성격이 아니라 잠시 동안 갑자기 임하는 성령 충만과 관련이 있다면, 성령의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성령에 의해 계속 지배받고 통제받는 사람의 성품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는 갈라디아서 52 22-23절에 언급되어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총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5:22-23).

 

         성경의 다른 곳에서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빛의 열매라고 하면서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5:9). 또한 성령의 열매를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라고 말하면서, 이 열매의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했다( 6:22). 이 말씀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실질적인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생활 속에 나타나는 인격의 열매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주석이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로 믿고 영접하면, 그때부터 성령이 그 사람 가운데 거하신다. 우리는 이를 성령의 내주라고 부른다.

 

1.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

 

일단 성령이 내주하신 후부터 한 사람의 삶은 점진적으로 예수 그리그도를 닮아 간다. 점진적으로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게 된다. 그렇게 살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렇게 살지 못하면 성령이 책망하시기 때문애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행복한 고민과 씨름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자신을 보면서 고민하고 또 분투한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과는 차우너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이를행복한 고민’, ‘행복한 씨름이라고 부르고 싶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기는 사람들에게는 사람이 공유할 수 잇는 정도의 그리스도의 성품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리스도인이라 하면ㅅ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이 삶에서 나타나지 않으면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컹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괸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7:16-20).

 

열매가 나무를 판별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나무 자체로는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 알 수 없지만,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좋은 나무에 나쁜 열매가 맺히지 않고, 나쁜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나올 수없기 때문에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한 사람의 말과 행위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잇다. 또한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인지, 육신을 좇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성령의 열매를 말하기 전에 육체의 일에 대해 언급했다. 이는 아주 중요한 것인데, 육체의 일을 통해 성령의 열매의 진가를 더 명확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매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짖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5:19-21).

 

여기에서 바울은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일을 대조하고 있다. 성령의 열매는 나

타내야 하고, 육체의 일은 내버리고 제거해야 한다.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육체의 일은 자기 중심적이다.

          곧 자기중심적인 삶의 결과는 육체의 일이고, 그리스도 중심벅인 삶의 결과는 성령의 열매이다. 성령의 은사가 능력과 관련이 있다면, 성령의 열매는 성품과 관련이 있다.

 

2.   성령의 열매의 아홉가지 특징

성령의 은사는 앞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22개의 다양한 은사들나타나고 있다. 이에 변해 성령의 열매는 헬라어 성경에 카르포스’(karpos)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단수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열매를 말할 때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들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사실 갈라디아서 5 22-23절에 기록된 것은 성령의 열매들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에 대한 특징들 혹은 특성들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들이 아닌 성령의 열매로서의 아홉가지 특징들이라는 표현이 옳다. 일부 학자들은 열매가 단수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5 22-23절에 기록된 성령의 열매는 사랑을 나타내는 다른 여덟 가지 특징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드와이트 무디는 그의 책 Notes from My Bible(내 성경의 기록)에서 사랑의 특징이 다음과 같이 다른 여덟가지 덕목들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희락은 크게 기뻐하는 사랑이고, 화평은 인식하는 사랑이며, 오래참음은 불굴의 사랑이고, 자비는 견디는 사랑이며, 양선은 실천하는 사랑이고, 충성은 싸움터에서의 사랑이며, 온유는 규율 있는 사랑이고, 절제는 훈련이 잘된 사랑이다.

 

그리고 바울은 실제로 사랑 장으로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에 대한 기술에서, 사랑을 성령의 열매의 특징들인 오래 참음온유등으로 설명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13”4).

 

그러나 사랑이 오직 성령의 열매이거, 다른 여덟가지는 사랑을 설명하는 덕목이라고 해석하기보다는, 아홉 가지 덕목들이 모두 예수님의 성품, 곧 성령의 열매를 가리키는 특징들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리고 한 가지 꼿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많은 사람이 성령의 ㅇ려매와 타고난 성품을 같은 것으로 혼동한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3:6)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선척적으로 타고난 성품과 후천적인 수련이 아무리 뛰어날지라도, 이는 원척적으로 성령의 열매와 다른 것이고 또한 비교 대상도 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척적으로 타고난 성품이나 수련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선천적으로 태어난 자선심 같은 것은 자칫 잘못하면 위산작인 것이 될 수 있다. 사랑이나 자비나 양선 같은 것들도 자기를 나타내거나 조건이 붙은 것들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일하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성숙해져가는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간구해야 한다.

그러면 성령의 열매를 잘 설명해 주는 아홉 가지 특징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사랑

성경 전체를 통해 사랑처럼 강조되고 떠 강조된 덕목은 없다. 그만큼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을 말할 때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하는 사항이 있다. 곧 사랑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알고 또한 실천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도 사람들이 보기에 큰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과 다르다.

      그 사랑은 천문학적인 돈을 기부하는 자선사업의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오지에 가서 의료, 농업 지도, 학교 설립 들의 봉사활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사랑은 인본주의적인 박애정신과 신념과 깨달음에서 오는 것이지, 성령이 일하신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조심스럽게 말하지만, 일부 사랑의 이름으로 행하는 선한 일들은 후대에 자기 이름을 남기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5 22절에 사용한 헬라어는 아가페’(agape)로 조건이 없는 사랑이다. 사실 조건이 붙은 사랑은 실핼하기가 쉽다. 반대급부를 기대하고 행하는 사랑은 성경적인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5:46)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배경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은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예를 드신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우너수를 사랑하면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이같이 아니하느냐”( 5:44, 46).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원수 사랑에서 이웃 사랑으로 승화되어야 한다고 복음서 여러 곳에서 강조하셨다. 단순한 이웃 사랑이 아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19:19)고 명령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7, 39).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12:31).

그리고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이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먼저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애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15:12-13, 17)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말씀은 그 자신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으실 것을 미리 이야기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셧기 대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에 빛진 자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이 우리르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사랑이 그리스도안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톡별히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신하게 하는 내적 증거라고 말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니라”(요일 4:7-8)

그리고 사랑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고, 그 사랑은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보내심으로 나타냈으며, 이렇게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의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시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셔씅ㅁ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셧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으 ㄹ본 사람은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9-12).

또한 예수님은 사랑이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내적 증거가 될 뿐 아니라, ‘외적 증거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13:35)고 말씀하셨다. 이는 사랑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하는 표지가 된다는 것이다. 아시 말해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식하지 못한다.

이 사랑은 인간의 타고난 자연적인 성품이나 후천적인 노력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하실 때 가능한 것이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5:5).

 

곧 성령의 일하심으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져야 한다. 자력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타력에 의해서만 서로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사랑은 머리로만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일하심으로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요. 영혼 깊은 곳에서 무한정으로 길어 올릴 수 있는 샘물 같은 것이다. 만일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 아니며, 성려으이 사람도 아니라는 말이다.

 

1)   희락

바울이 성령의 열매를 말하며 사용한 희락의 헬라어는 카라’(kara), 이는 환경에 의존하는 기쁨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물론 사랑처럼 희락 혹은 기쁨도 세상 사람들이 가딜 수 있는 삶의 한 부분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삶 가운데 기쁨을 경험하는 많은 기회들을 가진다. 인생 가운데 졸업, 취직, 약혼, 결혼, 출산 같은 좋은 일들을 통해 사람들은 기뻐한다.

 

어떤 사람은 학문적인 큰 업적을 남겨 그것이 널리 인정을 받을 때 기뻐할 수 있다. 운동선수는 큰 경기에서 승리해 동료 및 관중들과 함께 기쁨을 공유할 수 있다. 자신이 세운 목표를 성취할 때 큰 기쁨을 경험하기도 하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경사나 좋은 일을 통해 기쁨을 나눌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기쁨은 다 제한적이고 찰나적인 것이다. 그 일들이 다 지나가면 기쁨도 사라진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기쁨은 다 상대적인 것이다. 기뻐할 대상이 있어야만 기쁨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기쁨은 제한적인 것이 아니고, 찰나적인 것이 아니며, 상대적인 것도 아니다. 이 기쁨은 제한이 없고, 영원하며, 적대적이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하는 무제한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또한 영원한 것이다. 세상에서 얻는 기쁨은 일시적이지만, 주님이 성령을 통해 주시는 기쁨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참다운 기쁨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절대적인 것이다. 바울은 옥중에서 조차도 빌립보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4:4)고 말했다.

그가 말한 기쁨은 외적 환경의 변화에 좌우되는 세속적이고 일시적인 기쁨이 아니라, 시련과 역경에도 기뻐할 수 있는 내면적인 기쁨을 의미한다. 또한 그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말했다(5:3). 예수님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5:12)고 말씀하셨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항상 기쁨으로 충만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성령으로 충만하면 기쁨이라는 아주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표지를 달고 살 수 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2:46).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8:8).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13:52).

 

베드로는 우리가 보지 못하나 믿고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 대문에 말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라고 말했다. ‘말할 수 없는 기쁨은 바로 성령의 열매를 충만하게 맺는 성도들의 내적 증거요, 외적 표시가 되는 것이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8:10).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16:11).

 

3) 화평

화평이란 말은 히브리어로는 샬롬’(shalom)이고, 헬라어로는 에이레네’(eirene)인데, 이는 화목이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화목은 우선적으로 관계 회복을 뜻한다. 즉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화목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간의 모든 관계가 깨졌다( 3:14-19).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가 깨져 멀어졌고, 원수가 되었다. 인간과 인간은 서로 싸우고 미워하고 반목하면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화목 제물( 3:25; 요일 2:2; 4:10)이 되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이 되셨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2:14-16).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바울은 강조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5:1)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더불어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목으로만 끝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우리는 사람들과의 관계 회복에도 힘써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시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 하셨느니라”(고후 5:18-19).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 5:13).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좋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2:14).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예수님도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5:9)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사회에서 그리고 모든 이웃과 더불어 화평한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한다.

 

4) 오래참음

오래참음은 헬라어로 마크로뒤미아’(makrodumia)로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은 이를 인내를 뜻하는 페이션스’(patience) 혹은 롱서퍼링(longsuffering)으로 번역했다. 이 덕목은 타락한 인간의 성격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래 참는 것 곧 인내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이고 또한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그리도인들에게서 나타나는 덕목이다.

성경은 인내에 대해 크게 세 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로, 인내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라고 말했다( 86:15). 하나님이 참고 기다리지 아니하시면 그분의 진노 앞에 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2:4).

 

둘째로, 예수님은 친히 인내의 모범을 우리 앞에 보여 주셨다.

그분은 세상 되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언린양으로서( 1:29, 36; 8:32) 십자가에 죽기까지 인내하셨다. 성경은 그분의 오래 참으심이 우리에게 본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등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 1:16).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벧후 3:15).

 

셋째로, 인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든 성도들의 특징이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벧후 1:4).

그래서 바울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가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했고( 4: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고 권했다( 3:12). 그리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11)라고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다.

 

5)   자비

자비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크레스토체스’(krestotes), 이는 어원적으로 볼 때 메시아를 뜻하는 크리스토스’(Kristos)와 비슷한 유형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설명하는데 17회 사용되었고, 우리를 회개로 이끌어 준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2:4).

 

조지 우드는 크리스토테스가 영어 성경들에서 주로 친절’, ‘다정함을 뜻하는 카인드니스’(kindness)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친족혹은 형연을 뜻하는 ’(kin’친절함을 뜻하는 카인드’(kind)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즉 자비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마치 친족이나 가족처럼 친절하게 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반대로 자비가 없는 사람은 친절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배타적이고 적대적으로 대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자비로 대해야 한다.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6:36)고 하셨다. 이는 특별히 우리에게 잘못을 행한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를 말해 준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4:32).

 

사실 율법만을 적용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라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용서와 구원을 받았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이 하나님의 자비로 린한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대대로 나타내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2:7).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와 관용 들을 포함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주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5:7)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남을 용서하고 긍휼히 대할 때 우리도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이다( 18:35).

 

6)   양선

양선은 헬라어로 아가도쉬네’(agathosune), 원래 의미는 자선 행위를 뜻한다. 이는 자비를 실천하는 행위이다. 만일 사람이 진정으로 선하다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자비의 마음을 가질 뿐만 아니라 자비를 실천하게 된다.

물론 세상에는 바리새인과 같은 자선 행위들도 있다. 이는 자기 의에 도취된 행위이고,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배척해야 하는 행위이다. 이는 자신을 나타내거나 자랑하기 위한 조건부의 자선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나바를 가리켜 착한 사람”( 11:24)이라 했고, 고넬료의 구제 행위가 하나님께 기억된바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0:4, 31). 그리고 다비다라 하는 도르가는 성행과 구제하는 일”( 9:36)을 심히 많이 행했다고 했다.

 

7)   충성

충성은 헬라어로 피스티스’(pistis)인데, 이 단어는 성령의 은사들 중 하나인 믿음을 지칭하는 데에도 사용 되었다. 따라서 충성과 믿음은 같은 말이다. 충성과 믿음 둘 다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말은 신실함과 동의어이다. 하나님이 신실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신실하시다. 그 분의 신실하심은 아버지께 처음부터 끝까지 아들로서 충성하신 데서 나타났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2:17).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3:6)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의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1:5).

 

라디오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에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3:14).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본받아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하고( 24:45), “지극히 작은 것”(16:10)에조차 충성해야 한다. 특별히 충성은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필수적인 자격이다(고전 4:2; 딤전 1:12; 딤후 2:2).

 

8)   온유

온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라우테스’(prautes), 원래는 잘 길들여진 말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거칠고 제멋대로인 야생마가 주인이 잘 쓸 수 있도록 길들여진 상태를 뜻한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제멋대로 살다가 결국 광야 대학 40년을 수료한 후 하나님이 마음껏 쓰실 수 있는 온유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12:3)고 말했다.

또한 온유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11:29)라고 말씀하셨다.

온유는 경손’, ‘공손’, ‘친절등의 다른 의미들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약함은 아니다. ‘자기 비하혹은 꾸민 겸손과도 거리가 멀다. 성경 주해가 바인은 온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러므로 온유는 주님이 보여주신 것이고, 신자에게 추천된 능력의 열매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 주님은 마음껏쓸 수 있는 무한한 하나님의 자원들을 소유하셨기 때문에 온유하셨다.

 

따라서 영적인 온유는 리더쉽의 결핍도 아니고, 사람들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나약함도 아니다. 때로는 모세와 바울처럼 강력한 리더쉽이발휘되기도 한다.

바울은 도린도 교회 형제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이 그들을 다시는 방문하지 않을 것처럼 여겨 스스로 교만해진 이들이 있었다고 말했다(고전 4:16-21). 아마도 그들은 일부 지도자들이었던 것 같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바울은 그의 제자 디모데를 파송해 우선적으로 교회 내 문제를 수습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는 주께서 허락하시면 그들에게로 속히 나아가 그 교만해진 사람들의 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 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어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전 4:20-21).

 

여기서 바울은 그의 강력한 리더쉽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후에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고나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고후 10:1)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형제 중 한 사람이 죄를 범한 것이 드러나면 그를 바로 잡기 위해 온유한 심령을 가져야 한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6:1)

 

바울은 또한 온유는 주의 종들이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덕목이라고 거듭 강조했다(딤전 6:11; 딤후 2:24-25; 3:2).

 

9) 절제

절제는 헬라어로 엥크라테이아’(enkrateia), ‘자제혹은 극기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절제는 크게 두 가지 욥법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는 탐심의 유혹을 극복하는 덕목으로서 사용되었다. 바울은 당시 성적으로 문란한 삶을 살았던 벨릭스에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 24:25)을 전했다. 이 말을 들은 벨릭스는 두려워 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부부 간에 절제할 수 없으면 서로 분방하지 말라”(고전 7:5)고 권했고, 또한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전 7:9)고 권했다. 그는 교회의 감독에게 절제는 한 아내의 남편이 되는 것과 근신처럼 필수적인 덕목이라고 강조했다(딤전 3:2). 그리고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절제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딤후 3:3).

다른 하나는 경주에서 면류관을 얻기 위해 달리는 선수들이 절제하는 내용에 사용되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달리기 경주에서 뛰는 선수들이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 모든 일에 절제하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썩지 않는 면류관을 얻기 위해 모든 면에서 절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혹은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 4:13)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벧후 1:4)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평생 과제이고 목표이다.

그러나 이 평생 과제와 목표는 다른 방법으로써는 이룰 수 없다. 연륜이나 종교적인 활동이나 프로그램들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할 때만 가능하다.

 

예수님이 직접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15)로 말씀하신 것처럼, 가지인 우리는 포도나무 되신 주님께 붙어 있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가지 자체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무에 붙어 있을 때 나무로부터 진액을 공급받아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처럼 우리 스스로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위해 몸부림치고 씨름해야 한다.

 

 

9  성령의 일하심

 

우리는 1장부터 8장까지 성령의 신격과 인격, ‘성령세례라는 논쟁적인 용어의 성경적 정의, 성령세례와 방언의 관계, 성령 충만, 성령의 은사들, 신유, 성령의 열매 등 중요한 주제들을 다뤘다. 그러면 이제 성경 역사를 통해 성령의 특징적인 일하심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장에서 논하는 성령의 일하심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내용들과 반복될 수 있지만, 복습 혹은 요약하는 의미에서 볼 때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1.   성령은 그리스도를 알리시고 그 영광을 나타낸다.

이는 성령이 하시는 일들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성령의 가장 주된 관심사는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가 내 영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6:14)고 하셨다.이는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알리며 또한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계신다는 뜻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성령의 일하심은 전무하고, 모든 그분의 일하심은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일부 오순절주의자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성령을 더 강조한 오류를 범한 사례들이 있다. 이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에 입각한 바른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의 가장 우선 되고 특징적인 일하심이 바로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임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인한 은사들과 이적과 기사에만 너무 집중해 그리스도를 멀리하고 외면하는 어리석은 일은 피해야 한다. 성령이 오신 주 목적은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분을 나타내는 사실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은사나 이적, 기사를 통해서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 나타나도록, 그분께만 영광이 돌려지도록 힘써야 한다. 그런 교회와 개인은 잘못된 은사주의와 신비주의로 흐르지 않고 계속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2.   성령은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신다.

바리새인이며 산헤드린 공회의 장로였던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다. 예수님은 그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3:3)고 말씀하셨다. 니고데모는 이말을 듣고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3:4)라고 물었다.

그의 이 질문은 극히 정상적인 물음이었다. 당시 예수님의 나이는 약30세쯤 되었고, 니고데모는 유대교의 장로로서 아마도 50세는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니고데모로서는 자신같이 늙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고 또한 다시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그의 상식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ㄳ이다.

그대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3:5)고 재차 말씀하셨다. 즉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다시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라하니라”( 3:6-8).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을 바람에 비유하셨다. 바람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우리는 그 소리를 듣거나 느끼거나 나뭇가지와 잎들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바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거듭나기까지 성령이 그 사람 안에서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없지만, 성령의 일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 변화된 것은 볼 수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누구도 성령의 일하심이 없으면 거듭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1:12)은 전적으로 성령이 일하신 결과이다.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8:9)고 말했고, 또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고 말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크게 세 가지 면에서 사람들을 책망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6:8-11).

 

첫째로, 성령은 죄에 대하여 책망하신다. 이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우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 3:24)이 되는 것처럼, 죄에 대한 책망도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둘째로, 성령은 의에 대해 책망하신다. 이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호화롭고 값비싼 자신의 의로 만든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설지라도 그것은 단지 걸레 조각들을 엮은 것에 불과하다는 진리를 깨달은 후에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심판에 대해 책망하신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9:27)라는 말씀처럼, 인간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생을 얻지 못한 사람은 그 심판대가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되는 자리가 된다.

이같이 성령의 책망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더불어 영원한 형벌 대신에 영생으로 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신다.

 

3.   성령은 성도들의 신앙과 성품이 향상되게 하신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다고 해서 곧바로 성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거듭나자마자 인격적으로 흠과 점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거듭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그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야 한다( 4:13).

누구든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1:12).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성령이 그 사람 안에 거하신다. 내주하시는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성도들 안에 내주하신 성령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랄 수 있도록 일하신다. 성령은 성도들이 충분히 성장할 수 있도록 그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16:13).

성령은 성도들이 잘못된 길로 가거나 범죄할 때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해서 바로 밪으신다( 9:1; 13:5).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선한 양심”(딤전 1:5), “착한 양심”(딤전 1:19), “깨끗한 양심”(딤전 3:9), “청결한 양심”(딤후 1:3)에 대해 언급했다. 반면에 자신이 아는 사람들 중에 이 양심을 버린 자들이 있고, 믿음이 파선한 자들이 있다고 말했다(딤전 1:19), 그리고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짖말하는 자들”(딤전 4:2)이 있다고 말했다.

구원받고 은혜받은 성도들에 대한 경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성령이 꾸짖고 책망하실 때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바로 회개하고 돌아서면 그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다. 그러나 성령의 꾸짖으심과 책망을 계속 무시하고 제 갈 길로 가면 결국 양심을 버리게 되고, 양심에 화인 맞게 된다. 이런 비극적인 결과는 성령을 환영하지 않고 거역하는 행위들에서 온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을 거역하는 행위들에 대해 여러 차례 경고 했다. 먼저 그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4:30)고 말했고,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르게 한다고 경고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5:17).

 

그리고 성령을 소명치 말라고 경고했다(살전 5:19). ‘소멸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스벤뉘미’(sbennumi)인데, 이는 원래 불을 끄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말은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는 뜻이다.

그린도 교회성도들은 성령의 은사들을 분별없이, 무절제하게 사용했던 반면에,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일하심을 제한하거나 배척했던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특별히 예배 가운데 성령이 임재해 활동하실 때 이를 제한하거나 비판해서는 안된다. 이런 부정적인 것들이 바로 성령의 불을 끄는 행위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령을 훼방하는 것”( 12:31)을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는 이 죄가 비신자들에게 해당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  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   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12:31-32).

 

이는 성령을 거역하는 행위들 중 가장 심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함을 받을 수 있고, 심지어 인자곧 예수님을 거역해도 사함을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사함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령 훼방 죄란 무엇인가? 이 죄는 과연 이미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신자들에게도 적용되는가, 아니면 비신자들에게만 적용되는가? 우리는 성경해석학적인 면에서, 예수님이 말씀을 어떤 배경에서 하셨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단지 마태복음 12 31-32절만 가지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그 배경이 무엇인가?

사람들이 귀신 들려 눈이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나왔고, 예수님이 고쳐 주시자 그는 보고 말하게 되었다. 그러자 무리가 놀라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12:23)고 말했다. 곧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메시야가 아니냐는 말이다.그러자 바리새인들은 무리의 말을 듣고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12:24)고 말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   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  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힙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ㄱ스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  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겎느냐 결  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  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해치는 자니라”( 12:25-30).

 

그리고 곧 예수님은 성령을 훼방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셨는데, 바리새인들은 바알세불의 능력으로 쫓아냈다고 말했다. 그들은 성령의 일하심을 마귀의 일로 규정한 것이다.

마가복음은 같은 사건을 좀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왜 성령을 훼방하는 것에 대해 말씀을 하셔야 했는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  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저희가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렀   다 함이러라”( 3:28-30).

 

한글판 성경에서는 이는 --- 함이러라라고만 번역해 그 원뜻을 잘 나타내지 못했지만, 헬라어 성경은 호티 엘레곤’(hoti elegon), 그들이 말하였기 때문에라고 표현함으로써 인과관계를 정확히 하고 있다. 즉 당시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을 행하셨음에도 이를 사탄의 능력으로 행해ㅆ다고 비난했기 때문에 성령을 훼방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셧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를 믿고 그 안에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이라면 성령의 일하심을 마귀의 일로 비난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고 말했다. 물론 교회사를 통해 볼 때 성령의 일하심과 나타나심을 마귀의 일로 비난한 사람들이 잇기는 하지만, 아마도 무지의 소치로 인한 것이지 그들이 진심으로 성령을 훼방하려는 의도로 그렇게 말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윗은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비유했다. 이는 성도들이 성장하는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설명하는 비유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   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  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1:1-    3).

 

여기서 복 있는 사람을 나무로 비유한 것은 몇가지 면에서 의미심장한 교훈을 준다. 먼저 나무는 죽을 때까지 성장한다. 사람도 동물도 다 성장에 한계가 있다. 사람의 경우 남자와 여자가 약간 차이가 있지만, 20세 정도면 성장이 멈춘다. 동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나무는 나이테가 말해 주듯이 죽을 때까지 계속 성장한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계속 성장해야 하는 것을 암시해주는 것이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는 것’( 4:13)이 우리 모두의 궁극적인 영적 목표이다.

또한 나무가 성장하려면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하나는 흙이고, 다른 하나는 물이다. 둘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결핍되면 나무는 자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죽고 만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두 요소가 다 충족된 것을 말한다., 물은 성령을 의미한다. 흙은 말씀, 물은 성령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안에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말씀과 성령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말씀을 계속 공급받고 성령과 동행하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는 삶, 곧 성화되는 삶,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닮는 삶,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다. 말씀과 성령 두가지  요소 중 어느 하나라도 결핍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그리스도 안에서 자랄 수 없고,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1.   성령은 그리스도의 증인들에게 능력을 부여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사명을 완수하신 후 보혜사 성령을 보내신 가장 큰 목적 중의 하나는 그분의 부활에 증인 된 우리에게 권능을 부여하시기 위함이다( 1:8)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라고 말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효과적인 말씀 전파는 사람의 지식과 능력만 가지고는 불가능하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에게 그들이 죄인인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과 내세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이로 인해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해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기 전에 먼저 성령의 기름 부음이 필요 했다는 점을 강도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여   하심이라 하였더라”( 4:18-19).

 

예수님이 그리하셨거늘, 우리가 성령의 권능을 힘입지 않고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오래전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캐더린 쿨만(Cathryn Kuhlman) 여사를 도왔던 한 목회자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한 도시에서 대형 천막을 치고 부흥성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였다. 찬양과 기도가 끝나고 설교자가 강단에 설 시간이 되었는데도 그녀는 단위 의자 앞에 엎드려 계속 기도만 하고 있었다. 그가 찬양을 계속 이어 가면서 기다렸는데도 그녀는 좀처럼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사회를 보던 목사님이 쿨만 여사에게로 다가가서 설교할 시간이 되었다고 알렸다. 그때 쿨만 여사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아직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임하지 않았어요라고 말하고 계속 기도했다. 마침내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임하자 그녀는 강단에 서서 말씀을 전했고, 그날 밤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주께 돌아왔으며, 신유를 체험하는 놀라운 결과가 있었다고 한다.

 

 

2.   성령은 성도들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신다.

 

성경은 사람을 속사람겉 사람으로 구분한다. 속사람은 영적인 사람이고, 겉 사람은 육적인 사람이다. 속사람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고, 겉 사람은 육신의 지매를 받는 사람이다. 바울은 우리 속에서 이 두 사람이 서로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겉 사람 곧 육신은 선한 것이 없어,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실제로는 원치 않는 악을 행하게 한다고 말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와 법 어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7:20-25).

바울은 또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5:17)고 말했다. 여기서 육체의 소욕은 겉 사람을 말하고, ‘성령의 소욕은 속사람을 망한다. 바울은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우리가 원하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고 말했다.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는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3:16)라고 기도했다. 이는 바울의 기도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깇은 기도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우리의 신앙생활이 향상될 수 있다.

우리는 경제적인 부를 구하기 전에 먼저 속사람이 강건하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지금 교회에는 다양하고 멋지게 꾸민 프로그램들이 필요할 때가 아니다. 목회자들과 성도들 모두가 연약해진 속사람을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 달라고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교회와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신앙과 생활이 발전하고, 교회가 참다운 부흥을 이루려면 모두 속사람이 강건하게 된다.

 

마치는 글

성령론 연구가

활발해지기를 바라며

 

·       오순절 성령 강림은 그리스도의 탄생만큼이나 중요하다. _ 에드워드 어빙

 

지금까지 성령론은 신론, 기독론에 비해 뒷전으로 밀려나 있거나 인간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보다 덜 중요시되어 왔다. 신학자들과 성경학자들, 목회자들이 성령론에 무관심 했거나 혹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교회들 간에 이론이 생기면서 서로 반목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령론은 신학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라도 신학자들, 성경학자들 그리고 목회자들이 성령론 연구에 더 힘써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부족하나마 앞으로 성령론 연구의 활성화에 작은 디딤돌이라도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집필했다. 모든 교회와 목회자들이 이견 없이 받아들이고, 이를 계기로 성경에 입각한 더 좋은 성령론 책들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성경에 입각한 성령론 연구는 무엇에 기초해야 하는지를 몇가지 마누고자 한다.

 

1.   성경에 입각한 성령론 연구의 기초

 

1)    성령론은그리스도중심적이어야 한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알리고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따라서 겅령을 강조하려다 예수 그리스도를 도외시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성경적인 성령론은 그리스도로 시작하고, 그리스도로 끝나는 그리스도 중심적(Christ -centered)이 되어야 한다. 성령의 은사들도 필요하지만, 그리스도의 품성을 본받는 것을 뜻하는 성령의 열매가 성령론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

 

2)   성령론은 성경 중심적이어야 한다

너무나 다양한 성령론이 존재한다. 그 이론과 주장이 각양각색이다. 이는 저자들이 성경보다는 자신들이 속한 교단 혹은 교파의 교리에 편중하는 것이 그 원인이다. 안타깝게도 내부분의 교단 신학교들이 성령론에 대해 깊이 있게 가르치지 못한다. 게다가 그렇게 전해진 성령론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채 다른 저서들에서 되풀이 되기도 한다.

성령론 연구를 위해서는 교단 교리라는 신학적 편견을 내려놓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자신이 속한 교단의 신학자들이 무엇이라고 말했는가보다는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해야 한다.어느 교파에 속했든지 모두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3)   성령론은 목회 중신적이어야 한다

사실 신학은 목회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는 신학이라는 이론에 목회라는 실제가 접목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목회 없는 신학은 무의미하다. 따라서 성령론도 목회 중심적이어야 한다. 오늘날 신학교에서 배우는 성령론과 목회 현장에서 부딛치는 성령론에 큰 차이가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신학교에서 배우는 성령론과 목회 현장에서 실천하고 경험하는 성령론이 동일해야 한다.

 

4)   성령론은 선교 중심적이어야 한다

누구든지 선교사로 나가면 오순절주의가 된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기적은 사도 시대 이후로 종료되었다고 신학교에서 배운 선교사들이 실제로 선교 현장에 가면 흔하게 나타나는 이적과 기사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병자들을 위해기도하고 치료받는 기적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열악한 선교 현장에서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간절히 기도하다가 방언의 은사를 받고, 이를 유용하게 사용하기도 한다.

왜 이렇게 가르침과 실제가 다른가? 많은 신학자들이 성령이 .선교의 영이시라는 것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령의 가장 주된 일하심은 바로 선교를 위해 증인 된 사람들에게 능력을 부여하는 것임을 알지 못했기 대문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중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1:8)

 

그러므로 내가 인식하고 경험하는 영역만이 전부라 생각하고, 그 외의 것들은 다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해서는 안된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성령의 일하심으로 나와 다른 체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성령의 나타나심 혹은 일하심을 모조현상, 더 나아가서 사탄의 일로 비판해서는 안된다. 자칫 잘못하면 이는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많은 신학자들이 남미와 아프리카 같은 제3쇼ㅔ계 선교에서 전통적 교단들보다 오순절주의가 더 큰 영향력을 미친 가장 큰 이유는 성령의 경험적인 영역을 강조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폴 히버트(Paul Hiebert)와 발터 올랜베거(Walter Hollenweger)는 오순절주의 교차문화적접근이 제3세계 선교에 아주 효과적이었다고 말했다

폴 히버트(Paul Hiebert)는 문화를 그게 세가지 차원으로 구분했다. 텃째, 인식적 차원(connitive dimension), 둘째, 감정적 차원(affective dimension), 셋째, 평가적 차원(evaluative dimension)이다.그는 선교사들은 반드시 그들의 선교 임무에서 이 같은 문화의 세 가지 차원을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은 이 모두를 사용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폴 허버트는 감정적 차원이 종교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람들이 믿고 따를 수 있도록 우리는 복음의 지식을 감정과 함께 전해야 한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설득되어서가 아니라, 어떤 공포로부터 자유를 얻거나 사죄의 체험을 하거나 구원의 기쁨 때문에 복음에 반응하는 것을 인정하는 방식 안에서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음악, 예술. 연극, , 읫ㄱ 그리고 축제 들을 통해 자신들을 표현할 수 있도록 구런 방식들을 예비할 필요성을 가진다. 너무나도 개신교는 아프리카 사람들이나 아시아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지 못했는데, 이는 그들이 이미 갖고 있는 기존 종교들에 비해 개신교는 기쁨이 없고 색깔이 없으며 단조로운 것으로 생각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순절주의가 복음적 감정적 차원을 강조한다고 해서, 체험의 신학을 프리드리히 슐라이머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사람의 종교적 감정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고 일리엄 맥도날드(William MacDonald)는 지적했다. 크리스터 스텐달(Krister Stendahl)은 이를 보충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것을 성령의 고조(an upsurgeof the Spirit)라고 본다. 나는 이를 이를 고전압 종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약진을 위해, 마약이나 다른 약들에서 극복하기 위해 고전압을 필요로 한다.  전통적인 교회들의 손전등과 같은 저전압의 기독교는 충분한 파워를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 --- 종교적 체험의 고전압은 모든 경우에 모든 사람들에게 획기적인 현상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그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선교 현장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성령의 일하심을 우리의 신학적인 편견이나 교단 교리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이 원하는대로 일하실 수 있도록 성령의 활동과 지배에 순응하는 것이다.

 

1.    더 활발한 성령론 연구를 위한 오순절주의의 반성

 

이 책의 공동 저자는 오순절 계통인 미국 하나님의성회와 예수교대한하나님의성회에 속한 목회자들이다. 오순절주의가 한국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공헌한 것은 사실이지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점들도 있다. 따라서 더 활발한 성령론 연구를 제창하는 입장에서, 먼저 오순절주의 교회의 지도자들이 반성할 점즐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고 이를 논하고자 한다. 여기에 지적하는 반성할 점들은 필자들이 배격하는 것들이다.

 

1)    성령의 열매보다 성령의 은사들을 더 강조한 경향이 있다.

오순절주의의 원뿌리는 성결의 강조에 있지만, 이와 달리 성령의 외적 나타나심만 강조한 나머지 성경성숙이 결핍된 편향된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성령론은 성령의 은사들도 강조해야 하지만 그 열매와 지속적인 충만( 5:18)을 더 많이 강조해야 한다. 그럴 때 성령론이 이론과 실제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확산될 것이고 초대교회 때처럼 교회 밖의 사람들까지 칭찬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될 것이다.

 

2)    잘못된 은사우월주의이다

에드워드 오코너(Edward O’ Connor)카리스마니아’(charismania)라고 부른 것처럼, 일부 오순절주의자들에게는 은사의 수와 이를 통해 나타나는 현상으로 영적 상태와 영적 능력을 평가하는 잘못된 관행이 있다.

사실 성령의 은사들은 문자 그대로 성령이 나누어 주시는(고전 12)’선물들이다. 우리가 잘나고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니다. 복음 전파와 주의 몸된 교회를 잘 섬기도록 각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신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은사들이 나차나는 유무를 갖고 영적 상태와 능력을 평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성령의 열매 곧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을 얼마나 본 받았는지 여부가 영적 상태와 영적 능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어야 한다.

 

3)    번영신학’(Theology of prosperity)이다

일부 오순절주의자들이 이른바 번영신학’, 곧 예수 믿으면 누구나 부자되고 사회에서 성공한다는 왜곡된 복음을 강변하여, 그렇게 되지 못하면 신앙에 무언가 잘못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폐단을 초래했다.

복음 전도자가 명심할 것은 효과적인 복음 전도를 위해서는 그 시대나 사회의 문화 및 상황을 무시하거나 사람들의 욕구를 도외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러한 것들을 충분히 파악하고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복음 전파에 있어서 본질비본질을 구분해야 한다. 복음의 본질에 속하는 콘텐츠는 언제 어디서나 변할 수 없다. 복음의 본질을 바꾸어서는 안된다.

번영신학은 복음을 비복음으로 변질시킨 것이다. 콘텐츠 자체를 비틀고 오염시킨 것이다. 이는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파했던 천국 복음이 아니다. 천국 복음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 나라혹은 천국이 주제였다. ‘이미 우리의 삶에 이루어진천국과 앞으로 임할 천국에 대한 것이다. 예수님은 물론 사도들 중에 그 누구도 예수를 믿으면 누구에게나 부와 성공이 따른다고 가르친적이 없다. 번영신학은 부와 성공과 복에 대한 왜곡된 개념과 신념에 기반하고 있다. 번영신학은 종교다원주의와 세속주의를 만연케하는 매개 역할도 한다.

 

4)    대형 교회가 되기 위한 교회 성장을 추구했다

누구나 노력한다고 대형 교회를 목회하게 되는 것이다. 내형 교회가 되기를 지향하는 이유는 목회 성공에 대한 개념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성전의 크기나 교인 숫자는 목회 성공을 판단하는 척수가 될 수 없다. 사실 교회의 규모로 목회자의 자질과 능력을 판단한다면, 아마도 바울은 실패한 목회자로 위급될 것이다.교회의 규모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주권에 의한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 구원을 위한 복음 전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고, 목회자는 이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종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는 크고 작은 교회가 모두 필요하고, 중요한 역할 분담을 위해 하나님이 주관하고 섭리하신다.

만일 자신이 목회 성공의 비결을 터득하여 대형 교회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면 정녕 수치스러운 착각이다. 자신이 목회 성공 비결을 몰라서 작은 교회를 목회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자는 성경대로의 복음을 전하고, 착하고 충성되게 사역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비교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이러한 원칙을 적용하면 성공적인 사역을 하고 있는가 아인가는 스스로 가장 잘 알 것이며, 먼 훗낧이 아니라 지금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5:23).

 

예수님이 달란트 비유에서 하신 이 말씀이 목회 성공을 확인 할 수 있는 척도이다.

 

5)    성령론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했다

일부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운동의 선구자나 기수로 자처하여 입만 열면 성령을 언급하지만, 사실은 도리어 성령에 관하여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인 이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성령에 대한 표횬 방식도 부족하거나 그릇된 이해의 범주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성령 폭발’, ‘성령 운동’, ‘성신 클럽’, ‘성령화 운동’, ‘성령 운동의 기수라는 용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그러하다. 간결하고 강렬하며 호소력 있는 표현 방법을 택하다 보니 문장이나 용어의 축약이 지나치게 된 것이라고 선의로 해석해 보지만 어쩐지 석연치 않다.

누구도 성령을 독점할 수 없다. 인간이 성령을 성령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고 주관하며 사용하시는 것이다. 성삼위 하나님의 명칭과 관련된 표현을 하려면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3계명을 생각해야할 것이다.

오순절주의는 신학의 다른 분야에 대해 소홀했다. 그래서 신학 부재라는 비판을 들었다. 일부 오순절주의자들은 이 같은 신학 부재가 오히려 오순절주의의 장점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너무 학문적으로 파고들다 보면 영적으로 메마르게 되는 경향이 있다. 한편 체험만 강조하고 신학이 없으면 잘못된 방향으로 빠지기 쉽다. 신학이 없어서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는 것과 신학 때문에 영적으로 메마르게 되는 것 모두가 폐단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최근 국내외적으로 오순절주의자들 중에 신학적 이론과 경험적 실제에 있어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신학자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신약 신학의 대가이며 또한 주석학자인 고든 피가 대표적인 오순절주의 신학자이다.

이러한 흐름을 이어 받아 한국 교회에서도 성경에 입각한 성령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좋은 저서들도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것이 필자들이 이 책을 쓴 목적이고, 또 작은 소망이기도 하다. 부디 이 책이 균형 잡힌 성령론 연구를 위한 씨앗이 되고, 긍정적 자극을 끼치는 역할을 하기 바란다.

 

         오 성령이여, 내 심령에 충만히 임하소서, 이 태만한 거처의 어두운 구석마다 빛을 비추시고 당신의 상쾌한 광선을 뿌려 주소서.

         – 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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