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성령론_영성(Spirituality)이란 무엇인가?

성인성경학교 2024. 8. 18. 00:02

9. 성령론_영성(Spirituality)이란 무엇인가?

 

(살전 5:23)”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영과 혼과 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없이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영성(Spirituality): 신령스러운 품성이나 성질, 또는 정신적 경향, 영어 설명으로는 property or income owned by a church 교회가 소유한 수익이나 속성입니다. 또한 영혼의 품질’, ‘영혼의 성향혹은 영적센스라고도 합니다.

영성이라는 단어에 속한 이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나 헬라어로 퓨뉴마(Pneuma) 부르는데 , 퓨뉴마라는 의미는 1-2장에 나타나는 , 호흡 의미합니다.

 

(1:26-27)”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7)”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의 생기 호흡을 받고 생령이 인간은 호흡이 끊어지면 육신은 썩어 흙으로 돌아가고 하나님께로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생기호흡” “생령이라는 단어가 계속 소개되는데 모두 가리키는 단어들 입니다.

2008-9년도쯤에 당시 라스베가스 순복음 교회의 담임이시던 김종기 목사님을 강사로 퓨뉴마(Pneuma)라는 주제의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강사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우리 라스베가스 순복음 교회에서는 퓨뉴마(Pneuma) 설교를 많이하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을 하고있다 하면서 퓨뉴마를 소개하는데 저는 처음 듣는 생소한 단어로 인하여 은혜를 많이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우리 하나님의 성회에서 강력한 성령운동을 하는 목사님 중의 한분이셨습니다.

96년도에 현재의 우리교회 성전 건축이 마무리되며 다음해부터 교회가 해외 선교사역에 집중하게 됩니다. 98년도에 14일간의 북한 선교여행 사역에 저도 동참하게 됩니다. 북한의 나진 선봉 지역으로 들어가기 전에 중국 지역의 마지막 일정으로 백두산으로 오르기 전날 저녁에 백두산 입구에서 모텔에 묵게됩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며 잠시 기도하는 모임에서 인도하시던 목사님이 우리의 영성을 위하여 찬양을 드리자 하시며 우리교회의 주재곡이나 마찬가지인 ‘God is so good, He is Lord’ 찬양으로 몇곡의 찬양을 드리자 여행하느라 지치고 힘들었던 육신이 것이 많은 특별한 선교여행이라 긴장감으로 흥분하던 일행들이 우리교회의 특유하고 차분하고 잔잔한 찬양으로 드리고 났더니 지친 심신이 회복되며 새힘과 성령으로 충만하여 짐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찬양을 드리며 기도로 끝마쳤는데 우리 일행을 안내하던 중국 공산당원이라는 조선족 자매가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자매님이 나중에 받은 느낌을 간증합니다.

안내원 조선족 자매가 남한에서 여행 목사라고 하는 group 안내하는데 그들은 자신을 무시하거나 하는 일이 전혀없이 예절이 바르고 다른 남한에서 여행객들과는 많이 다르더랍니다. 그래서 !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다르구나. 그렇게 느끼고 있었는데 우리 선교팀을 만나게되고 기독교인에 대하여 자세히 접할 있는 기회가 되었다.  만나서 참으로 기쁘다는 간증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영성 공산당원의 마음을 녹일 있는 영적인 힘이, 바로 영성이라 믿습니다. 영성을 현실감이 있도록 예화를 소개하였는데 어떤 느낌이 오십니까?

 

영성을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영성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는 단어입니다. 성경에 없기에 교회에서 많이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90년도초반 부터 인터넷이 열리며 한국교계를 들여다 보니 영성이란 단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2000년도에 영성이란 단어가 [생명의 삶과 소금과 ]이라는 온누리 교회에서 발간하는 신앙잡지에 영성이란 무엇인가? 소개되면서 기독교계에 영성이란 단어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합니다.

신령스러운 품성이나 성질, 성향 또는 정신적 경향을 의미하는 단어이되 한마디로 이것이다 잘라 말할수 없는 단어가 영성이란 단어입니다.

영성이란 단어와 함께 신령이란 단어를 생각해 있습니다. 영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위에서 이미 소개한 단어입니다. 신령이란 단어를 당시에 성경을 써치한 내린 정의는 하나님께 속한 모든 영적인 이라 기억합니다. 명사로 쓰일 때는 모든 신과 영물을 뜻하는 . 동사로 쓰이면 신기하고 영묘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신령한 것들이 구원받은 성도를 통해서 밖으로 나타날 때에 성도의 믿음과 영적인 성품에 따라 , 또는 어떤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서, 각각 다른 영성으로 나타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통교단이라 할지라도 교단에 따라 영성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같은 오순절 성령을 받은 몸에 붙어있는 교인 이라고하더라도 기존 세대와 젊은 세대의 영성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또한 영성을 다른 말로 믿음의 색깔로도 표현할 있습니다.

지금 우리교회의 구원받은 분들, 믿음의 열심으로는 따라올 자들이 없는 은사가 넘치고 성령으로 충만한 오순절 교인이라도 각자에게 있는 개성에 따라 믿음의 색깔도 조금씩 다를 수가 있습니다. 믿음의 색깔을 영적인 취향 또는 taste 다르다 표현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영성을 기독교인에게서 풍기는 냄새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믿는다는 기독교인을 바늘로 찌른다면 무슨 냄새가 풍기어야 할까요?

 

오늘의 본문 말씀 (살전5:23)”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영과 혼과 상태가 앞에서 어떠하느냐에 따라 다른 영성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영성(spirituality)’ 바르게 정의 내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과학 문명과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수록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같지만  사람은 원래부터 영적인 존재이므로 영적인 목마름과 갈망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하나님을 사람 속에 넣어주셨다 말씀하고 잇습니다. (1:19)”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하십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인간들이 끊임없이 신을 찾으려 하는 역사가 보입니다. 세계 곳곳 어느 곳이나 인간이 살던 흔적이 있는 곳에는 신을 찾으며 섬기던 흔적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자들 중에서도 영성에 대하여 알고자하는 시도는 계속해서 일어 것입니다. 교회는 가운데서 성경적인 영성이 무엇인지 가르쳐야 하고 바로 제시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영성이 무엇인지 바르게 정의를 내려야 것입니다.

믿는이들에게 혼란스러운 영역 중에 하나가 영성 분야일 것입니다. 어느 글을 보니 영성이라는 단어는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단어는 경건’(예를 들어 딤후4:8)이라는 것입니다. 영성이란 단어는 일반 종교에서 사용하는 단어로서 동양의 신비 종교나 자기초월, 뉴에이지(new-age)등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안에서 영성운동을 하는 여러 리더들이 모두 그런 선상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영성이라는 단어를 바르게 정의하면 굳이 영성과 경건을 구분해서 영성운동을 하는 지도자들을 비난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영성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인 정의(사전적인 정의) 살펴보면 신령스러운 품성이나 성질이라고 정의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시 구체적으로 풀어서 정의하면 어떤 종교의 가리침이나 정신대로 살아가는 합니다. 영성이란 인간의 삶의 본질과 목적에 관한 확신에 따라서 사는 개인이나 공동체의 삶의 스타일라 있습니다(안영권, ‘빛과소금’ [기독교 영성이란 무엇인가?], 1993. 10.)

영성이란 삶의 스타일이며 삶의 방식 의미합니다. 모든 종교가 나름의 교리와 주장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가르침과 교리(정신) 따라 살아가는 삶이 바로 영성인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모든 종교에 영성이 존재합니다. 불교의 영성이 있고, 이슬람의 영성이 있고, 기독교의 영성이 있는 것입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대로 살면 그것이 바로 불교의 영성이고, 코란의 가르침대로 살면 그것이 바로 이슬람의 영성인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면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영성이라는 것입니다. 영성이란 기독교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종교에 영성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한가지 던져야 합니다. 질문은 그렇다면, 다른 종교와 기독교의 영성이 다른 것은 무엇인가?” 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일반 종교와 기독교 영성의 차이점을 모르면 아주 혼란에 빠지게되며, 여러 문제들이 발생할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단어를 정의하는 차원에서는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만. 하지만 거기엔 본질적인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일반 종교의 영성에는 관계’(RELATIONSHIP)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영성에는 관계 존재합니다. 아니, 기독교 영성에서 관계 버리면 그것은 이상 기독교 영성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은 일반 종교의 영성과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영성을 율법주의라고 부릅니다. 율법주의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교리의 가리침대로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열심히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영성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관계 기반으로 합니다. 성경적인 영성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교제)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다루었던 영성의 정의를 다시 관계라는 측면에서 정리해 보아야 합니다.

불교의 영성은 석가모니(불경)  가르침대로 사는 것인데, 그러면 거기에 석가모니와 교제한다는 개념이 있을까? 단연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석가모니는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죽었고 무덤이 존재합니다. 그의 많은 가르침은 기록되어 남아있지만 이상 교제할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슬람은 어떠한가요? 그들은 유일신을 믿는다. 그들이 믿는 알라 전능한 신이면서 유일신이다. 하지만 코란을 통해서 알라와 교제한다거나 알라와 대화한다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신의 역사나 기적이라는 것이 없기에 교제할 있는 그런 대상이 없습니다. 다만 믿는 신념과 율법에 따라 행하는 믿음은 있으되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반 종교의 영성에는 반드시 자기 초월적 개념이 등장해야 합니다. 인간의 영역 안에는 신이 존재하지도 않고 만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영역으로   나아가기 위해 인간이란 존재를 뛰어 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점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런 자기 초월적 경험을 위해서 많은 종교들이 소위 영성훈련한다고 합니다. 그들의 영성훈련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신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고, 신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불교적 영성 혹은 가톨릭적 영성이라고 부릅니다. 불교적 영성은 자기 학대와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서 신의 영역에 도달하여 신처럼 되는 것입니다. 인간 쪽에서 신을 찾아가는 그들의 허망한 영성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영성, 성경적인 영성은 그런 개념이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 영성은 인간의 자기 초월을 통해서 신의 영역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성육신, 1:14).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번째 이름을 임마누엘’ (1:23,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라고 부르십니다.

또한 신구약 성경 곳곳에 하나님은 인간 가운데 임재하시고 강림하시는 분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것을 가장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성막이고 성전인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통해 완성된 구원의 목적으로 성령님의 내주에 있다는 것입니다.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없느니라

사람이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순간 구원받은 자의 증표로 삼위일체의 성령 하나님 께서 임재하시며 성령으로 보증하십니다.

우리는 것을 십자가 영성, 복음 중심적인 영성이라고 부릅니다. 것은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기 위해 아무 것도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며,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나은 존재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질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오직 십자가에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느 수준으로 끌여 올려야 필요가 없습니다. 많은 도를 닦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영접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한국교회 안에 불교의 영성이 존재하고, 카톨릭적 영성이 마치 성경적인 영성인 것처럼 가르쳐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 타락의 원인을 다시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타락하게 되었는가? (3:5) 보면 뱀이 하나님이 만드신 여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맑아지고, 하나님 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되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새번역) 뱀이 여자를 유혹할 , 유혹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나님처럼 있다는 것이다. 여자는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인간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시도한 것이 바로 타락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결과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시도를 빈번하게 시도합니다. 타종교의 영성이 그러합니다. 모양은 다르지만 모든 종교의 영성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영성은 핵심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친밀(intimacy)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의 영성의 본질이고 핵심입니다.  그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있는 것입니다. 온전한 순종은 친밀한 관계 가운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영성은 무엇을 보거나 무엇을 체험해서 나은 존재가 되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분과 교제함으로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중심에 십자가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 영성을 논할 없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영성이 아닙니다. 많은 한국교회 안에 잘못된 영성이 깊이 박혀져 있습니다. 샤머니즘 영성, 불교적 영성, 카토릭적 영성이 마치 기독교 영성인 것처럼 인식되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가 십자가 영성, 복음 중심적인 영성이라는 한번구원 영원천국의 영성입니다. 오순절 영성으로 넘어가기 전에 십자가 영성을 자세하게 다루는 것은 십자가가 우리의 믿음의 근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가 우리의 믿음의 근간이 되는 피의 영성, 보혈의 영성, 십자가의 영성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완벽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하던 강도의 기초적인 신앙고백 모두 동일하게 영원한 천국에 들어 갈만한 한번구원의 신앙고백이며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니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말씀절은 동일한 예수님의 영원천국 보장의 말씀 입니다.

 

예수의 피의 영성, 보혈의 영성, 십자가 영성으로 죽는다면 순간 천국은 따논 당상으로 보장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른쪽에 달렸던 강도의 보잘 것없는 믿음이라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낙원에 들어 경우 입니다. 진정으로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주로 믿고 낙원에 들어 강도의 영성, 여기까지가 한번구원 영원천국의 영성입니다.

 

그런데 좋으신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고아와 같이 홀로 구원의 여정을 가도록 홀로 두지 아니하시었습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16: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14:16)

다른 보혜사라 하시면 보혜사가 이미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성부, 성바,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 성자 하나님은 여러 다양한 호칭을 갖고 계십니다. 인간의 모습을 입고 예수이름으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자신을 생명의 이라 선한 목자 또한 나는 이라 하셨으며, 부활이라,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1:21-22)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하나님이시니라” (고후5:5)

앞에서 십자가 영성을 무엇이라 했습니까? 강도가 구원받고 낙원으로 직바로 들어가는 영성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영성은 구원의 여정, 믿음의 여정에서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마치 영혼이 응애하며 태어나서 험난한 구원의 여정의 천국을 향한 길이 마치 천로역정과 같아서 마귀의 유혹을 뿌리치고 스스로 천성문 앞까지 홀로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십자가 영성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주님께서 성도를 구원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믿습니다.. 그것을 견인이라 합니다. 실족하더라도 주께서 나를 구원으로 인도, 견인 하실 것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한 생각의 영성, 그러한 믿음에는 천국의 확신이 없습니다. 십자가 영성에서 멈추어 있기에 그들은 죽어보아야 있지 않겠느냐. 죽어서 하나님 앞에 보아야 구원을 받을 있는지 있는 것이지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있느냐? 오히려 질문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월권하는 믿음이라나요?

공중권세를 임시로 잡고있는 사단이 짜식은 굶주린 사자가 먹이를 찾아 헤메며 으르렁 대듯 구원받은 성도라도 유혹하여  지옥으로 끌고가려 기회를 틈타고 있습니다.

오순절 영성은 그러한 불확실한 죽어 보아야 하는 아는 믿음, 굶주린 마귀에게 만만한하게 보이는 그러한 믿음, 유혹을 받을만한 영성이 아닙니다. 말씀안에 있는 보혜사 성령의 보증으로 주시는 오순절 영성은 일대 구원의 확신으로 진리의 , 하나님의 , 예수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이 친밀하여져서, 명하시면 망서림이 없이 행하는 믿음, 성령님과 동행하며 천국까지 동행하는 영성이 오순절 영성 입니다.

성령충만, 천국보장 오순절 영성입니다.

저는 우리교회를 한마디로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하고 동안을 성령 안에서 고심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옆구리를 찌르시면서 사단이 틉타지 못하는 교회 하시는 성령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렇지! 우리교회는 사탄이 틈타지 못하는 교회이지, 우리교회는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교회, 성령님께 순복하는 교회, 사단이 틈타지 못하는 교회 입니다.

성령충만, 은사충만, 열심과 믿음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우리교회 교인들을 바늘로 찌른다면 무슨 냄새가 풍기어야 할까요?

우리들 중에서 구원의 확신에서 흔들리는 분이 있으십니까?

 

저의 권면으로 마치겠습니다.

정직하십시요

하나님은 만홀히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며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우리들을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때로 정직에 직면합니다.

때때로 상황에 따라 정직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정직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말과 행동이 언제나 일치한다는 뜻입니다

 

정직은 나의 길에 방해가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정직을 피하고 싶을 때가 있고

그냥 무시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마십시요

정직은 인격을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인격이 정직한 영성을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정직하십시요

그리고 정직과 대면하도록 노력하십시요

정직과 대면할 진정한 오순절 영성이 나타납니다

정직과 직면할 진정한 오순절 영성이 나타납니다

 

정직과 직면할 동행하시는

성령님께 의탁하는 영성인지 수가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정직할 때에 십자가의 영성을 믿는 것이 되며

정직함이 오순절 영성으로 성령으로 행하는 믿음입니다

 

정직이 원죄와 자범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은 정직한 위에 임하시며

주의 권세와 능력을 더하여 주십니다

 

그러면 앞으로 가까이 멀리 그리고 높이

보좌앞으로 올라 있을 것입니다.

정직은 무엇보다도 당신 자신입니다.

당신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요.

(살전 5:23)”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영과 혼과 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없이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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